수백년 이어온 우리네 어머니의 손 맛

그러나 주거환경과 식생활의 변화로 사라져 가고 있다
풍들의 몸살도 끝이 나고 나무들마다 겨울 채비를 한다. 논배미마다 볏집가리들이 올망졸망 늘어나고, 소나무와 잣나무는 푸른 빛을 더하며 조용히 자신을 털어내기 시작한다. 속옷만 벗고 나머지는 푸른 모습 그대로 수선을 떨지 않아도 산 속 어른이 되어 의젓하니 겨울을 지켜낼 준비를 하고 있다.
서리가 내리고 낙엽이 지면 어머니들의 손길이 분주해진다. 서둘러 무와 배추를 뽑아 김장 준비를 한다. 신통하게도 배추는 안으로 자신을 샛노랗게 채워가고, 무는 겉으로 하얀 속살을 채워낸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품앗이 김장을 담그던 작은 축제의 날, 막 버무려낸 빨간 김장 김치에 싸먹는 고소한 두부의 맛이란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그뿐이던가. 맛깔스럽게 담근 김치가 항아리 속으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핵가족화와 ‘아파트 문화’의 보급으로 초겨울의 작은 축제 ‘김장’은 옛 추억쯤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 빚어진 ‘중국 김치파동’이 올겨울 김장문화를 되돌려 놓고 있다. 내 가족 김장김치 직접 담가 먹자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른바 김치 파동 여파로 국산 김치가 전성시대를 맞고 있는 가운데 ‘김장김치 담그기’ 패키지 관광 상품이 나오는가 하면 곳곳에서 김장축제가 열리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김장철을 맞이하여 지난 12일부터 13일 이틀간 ‘2005 김장대축제’를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가졌다. 금년의 남산골 한옥마을 김장대축제는 팔도김치 전시, 맛있는 김치담그기 강좌, 김치담그기 체험 등으로 구성되었다. 김장담그기 체험행사에서 만든 김장김치는 무의탁노인 양로시설 및 아동시설, 장애인보호시설 등 소규모 사회복지시설에 전달하여 따뜻한 이웃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특히 올해는 이른바 김치파동으로 기업체와 일반인의 참가문의가 폭주하는 등 그 열기가 뜨겁다.
김장은 엄동(嚴冬) 3∼4개월간을 위한 채소 저장의 방법으로 우리나라에서 늦가을에 행하는 독특한 주요 행사다. 김장김치는 배추·무를 주재료로 하고, 미나리·갓·마늘·파·생강과 같은 향신미의 채소를 부재료로 하여 소금·젓갈·고춧가루로 간을 맞추어 시지 않게 겨우내 보관해 두고 먹는 침채류(沈菜類)의 하나다. 비타민 A·C가 많이 들어 있으며, 김치가 익는 동안에 생긴 유산이 유산균의 번식을 억제하기 때문에 정장작용(整腸作用)을 하여 비위를 가라앉혀 주는 역할을 한다.
김장은 예로부터 ‘겨울의 반 양식’이라 하여 어느 지역 어느 가정에서나 필수적으로 담갔는데, 김장철은 대체로 입동 전후가 알맞은 시기다. 김장김치는 5℃ 전후의 낮은 온도에서 온도의 변화없이 익히고 저장하여야 맛이 좋고 변질되지 않으므로 알맞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보통 김치광을 따로 두어 그곳에 김칫독을 묻고 짚방석을 만들어 덮는다. 짚방석을 덮는 풍습은 방한의 효과뿐만 아니라, 볏짚에서 잘 번식하는 김치의 숙성에 필요한 미생물을 번식시키려는 목적도 지닌다.
온 가족과 이웃들이 함께 모여 김장을 시작하면 한쪽에선 소금물에 절인 배추를 씻어 소쿠리에 담고, 한쪽에선 무우채를 썰고 파 마늘 생강을 다진다. 무채에 양념 다진 것과 멸치젓, 생새우, 생굴, 배 등 온갖 걸 넣고 속을 만든 다음 배추에 버무린다. 간이 적당한 지 배춧잎에 싸서 서로 입에 넣어주며 깔깔댄다. 다 버무리고 나면 독에 차곡차곡 넣고 우거지를 덮는다. 맛있게 보이는 걸로 미리 골라뒀다 함께 일한 이들에게 몇 포기씩 나눠주고 속이 남으면 대접에 따로 담아 배추와 함께 상에 올린다. 미리 파놓은 땅속에 독을 묻고 밀짚을 덮으면 김장 끝이다.

김장 김치만 있으면 겨울내내 쭉쭉 찢어 밥 위에 올려놓고 먹기도 하고, 김치국도 끓이고 김치전도 붙이고 김치찌개도 한다. 메밀묵과 도토리묵도 무치고 시원한 국물에 국수를 말아 밤참도 먹는다. 뿐이랴. 예전엔 삭풍에 귀가 얼으면 얼음이 버석버석 하는 김치국물에 넣어 얼음을 빼고, 연탄가스 중독의 특효약으로도 썼다.
김치는 이제 가정주부의 손을 떠나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으로 공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미 2년 전인 2003년 조사로는 가정주부의 33%가 “김장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전국의 김치생산업체는 7백여개 업체. 한 집안의 중요한 연례행사였던 김장은 이제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는 과정에 들어섰다.
원래 김치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특징을 지닌 전통의 산물이었다. 김치 속에 약간의 새우젓을 넣는 경기지방 김치가 담백하다면, 고춧가루와 젓갈을 듬뿍 쓰는 전라도 김치는 감칠 맛 나는 겨울양식이었다. 또 유명한 개성김치는 보쌈김치였고, 북한에서는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백김치여서 국물은 냉면 육수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특성들은 김치가 공장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획일화 되어 갔다. 김치는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이다. 서양사람들이 오렌지 주스나 코카콜라 같은 입맛 돋구는 음료를 마시고서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달리, 우리에게는 김치라는 맛깔스런 발효식품이 있어 즐겁게 음식을 들 수 있다.
시대가 바뀌면 세상이 변하고 삶의 양식도 바뀌게 마련이다. 게다가 의·식·주는 각기 떨어져 별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한옥 대신 아파트 생활이 일반화되면서 집에 관련된 건 물론 입고 먹는 일 등 살림살이가 모두 크게 바뀌었다. 그러다보니 김장 담그는 일은 손이 많이 가는 ‘번거로운’일이 돼버렸다.
그래도 올해는 불량김치파동으로 김장 담그는 손길이 분주하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손으로 김치를 버렸으니, 그것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와도 무슨 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내 가족 건강하게 겨울을 나게하려는 어머니의 마음만은 예전과 그대로다. 그 마음이 있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 김장이 이어져온 것이 아닐까? 서리가 내리고 낙엽이 지는 겨울의 초입에서 내 가족의 건강한 먹거리를 생각하며 고되게 김치를 담그던 어머니의 정성과 손맛이 김장 한포기 한포기에 가득 담겨있다.
<허유나 기자>
yunari86@dankook.ac.kr
▲ 김장은 엄동 3~4개월간을 위한 채소 저장 방법 중 하나였다.
<허유나 기자>  yunari86@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