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힘 삶의 가치

박 영 석 / 산악인

세파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면

언제였던가. 누군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삶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삶이 생각난다’고. 그렇습니다. 되돌아보면 저의 삶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물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등반과 등정의 삶의 길을 걸어오며, 또한 그때마다 무수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저는 단 한번도 제 삶에 있어 포기를 떠올려 본적이 없습니다.
히말라야의 사납고 깊은 밤, 수천 길 절벽 끝에서 삶의 전부를 가늘디가는 자일 하나에만 온전히 의지하고 매달려 있으면 유약한 인간으로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말라야의 깊은 밤보다 더 깊은 고독, 물 한 방울, 산소 한줌이 아쉬운 극한상황, ‘산의 영혼’이 되어버린 동료들, 혼자만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 헤아릴 수 없이 절망하고 또 절망하였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것은 살아오며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절대 포기 할 수 없다는 제 삶의 신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살아가며 절망을 체득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절망 속에서 피는 희망의 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 마치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눈밭으로 여리지만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트리는 복수초(福壽草)처럼.
저에게 알피니스트로서의 삶은 아주 우연히 찾아 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1980년, 마나슬루 원정대의 시청 앞 카퍼레이드를 지켜보며 내 젊은 가슴은 고동 치기 시작했습니다. ‘아, 바로 저것이었구나. 내가 할 일은 바로 산악인이다’. 온몸에서 힘이 불끈 솟아났고, 가슴 속에서는 커다란 불기둥이 솟구치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도 알피니스트가 되기 위해 체육교육과에 진학했고, 입학하자마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등산부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일년 열두달, 저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 결과 85년에 일본의 북알프스(3,190m)를 시작으로 제 알피니스트의 삶은 서막을 열었습니다. 지금 저는 산(山)에서 비롯된 수많은 기록들을 갖고 있습니다. 93년에 에베레스트 남동릉(8,848m)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아시아인으로서도 최초로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고, 2001년 K2(8,611m)에 이르기까지 히말라야의 8,000m급 14좌를 8년 2개월이라는 세계최단기간에 등정했습니다. 이 기간에 저는 세계최초로 6개월만에 히말라야의 8,000m급 5개봉에 올랐고, 기네스북에도 기록되어 있는 1년간 히말라야 8,000m급 6개봉 등정이라는 기록도 남겼습니다. 또한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히말라야 14좌와 7대륙 최고봉에 모두 올랐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2극점을 완등 하기도 했습니다. 2004년에는 세계 최단기간에 남극점을 무보급으로 정복해 냈고, 마침내 지난 4월 30일 북극점에 깃발을 꽂아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3극점을 모두 디딘 세계 최초의 산악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산(山)에 비하면 ‘노루 꼬리’ 같은 것입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노루의 꼬리. 그렇습니다. 산(山) 앞에 서면 그러한 기록들은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고, 늘 새롭습니다. 모든 인생의 나날들이 새롭듯이, 산은 그렇게 저에게 새로움의 대상이자 숭고(崇高)의 존재이지 기록의 존재가 아닙니다. 인생의 나날이 기록의 존재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백해무익하겠습니까.
저는 산을 오르며 늘 스스로에게 왜 산에 오르는가를 묻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이룰 것 다 이루었으니 가족들 곁으로 돌아갈 때도 되었지 않느냐고 묻곤 합니다. 저도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일년 중 절반을 넘게 산에서 보내는 제 삶 속에서 두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특히 절체절명의 고통 속에 갇혀 있으면 그 그리움은 설움으로 북 받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산을 오를 수밖에 없는, 산에서야 비로소 가슴이 뛰는 영원한 산악인이기에 산을 오릅니다.
그것은 권력, 명예, 사랑, 행복 등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무엇이든 그 목표는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우리네 삶에 원동력이 되어 주듯이 제 삶의 목표는 ‘산’이었고, 그 목표를 향해 원 없이 매진했기에 감히 제 인생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잡다단한 오늘을 사는 젊은이 여러분. 점점 더 시대적 환경이 삶을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여건들이 여러분의 삶을 제 아무리 옥죄어 오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산(山)에서 절대 강한 인간도 절대 약한 인간도 없듯이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만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약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수련(睡蓮)은 피어납니다. 여러분 앞에 놓인 절망의 암벽을 혼신의 힘으로 오르십시오. 그렇게 올라보면 비로소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산(山)의 정상(頂上)도 그러하듯이 인생의 궁극도 ‘인샬라’입니다.
박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