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서울65

독립과 자유의 역사, 그 중점에선 4대 가족사
어머니는 붉은 글씨로 쓰여진 책 제목을 보고 모두 버리려 했다

민주화운동과 광화문 : 김만옥의 <그리운 거인들> 읽기

김만옥의 <그리운 거인들>(1989)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평범한 소시민인 아버지와 운동권 학생인 ‘나’와 여동생 융이를 통해 현대사의 명암을 담담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4대에 걸친 독립운동가의 가족사 속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었던 할아버지가 사실은 일제에 협력했던 이중간첩이었던 것이다. 독립군 가족이라는 명망으로 거리낌 없이 살았던 증조할머니와 다르게 할아버지는 자신의 죄과 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회에 적응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였다. 자신의 양심을 지킨 것이다. 아버지는 부친에 대한 반감으로 철저하게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왔다. 이 텍스트 속에는 아버지의 현실주의적 보수성과 신세대인 여동생 융이의 진보적인 성향이 갈등과 화해를 하고 있다.
이 텍스트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전의 학생운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은 대학생들에게 실천을 요구하였다. 화자 주인공인 ‘나’는 현실의 중압감에서 잠시 도피하기 위하여 카투사병으로 복무 중이었지만 여동생 융이는 적극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삼촌의 송별식 날이 공교롭게도 신문로에 있던 구서울고등학교 자리에서 신민당이 주관하던 개헌촉진대회가 있던 날이었다. 정권이양이 되든 정부이양이 되든 변화가 있어야 할 시기를 일 년 남짓 남기고 헌법을 고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정권에 대해 민중들의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송별식에 모인 가족들은 귀가하지 않는 고종사촌동생 광무와 여동생 융이 때문에 모두 불안감에 사로잡혔고 이 불안감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대회에 참가한 두 동생이 모두 경찰에 연행된 것이다. 고등학생이었던 광무는 금방 풀려나 귀가해서 자신의 전과를 자랑처럼 이야기하였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광화문으로 갔다. … (중략) … 그들이 버스에서 내려 광화문 정거장 근처의 땅을 밟고 몇 발자국도 걸어보지 못하고 돼지새끼들이 우리로 몰리듯이 몽둥이로 맞으며 몰려 들어간 곳이 소위 닭장차였던 것이다. … (중략) … 삽시간에 차는 만원이 되었고 차가 움직여 가는 사이에도 고개만 쳐들었다 하면 「목아지 숙여 이 새끼야」소리와 함께 몽둥이가 날아왔다.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예 고개를 다리 사이에 쳐박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 (중략) … 「이 새끼야. 거기는 왜 갔어? 너희 학교가 거기야?」「거기라뇨? 거기가 어딘데요」 「이 자식이? 광화문 말야」「산 짐승이 어디는 못가요? 학생은 학교에만 가라는 법이 있어요?」 「이 새끼가 어디서 말대꾸야」그리고 철썩 따귀를 때렸다. 매 맞는 학생보다 옆에 서 있던 광무가 더 움찔했다.” 광무는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청소년다운 우쭐함으로 유쾌하게 이야기를 토해냈지만, 어머니와 나는 동생 융이에 대한 걱정과 아버지의 분노 때문에 안절부절 하지 못한다.

드디어 남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다는 융이의 전화가 오고 집안은 삼촌의 장도를 축복하는 분위기에서 삽시간에 초상집처럼 변했다.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은 일반시민들에게 탄압에 대한 공포와 정권안보적인 레드 콤플렉스의 자장 속에서 이해되었다. 어머니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 융이의 연행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방과 융이의 방을 기웃거리다가 말했다.「양쪽 방 서가에서 불온서적부터 치우자.」 … (중략) … 「도대체 불온서적 아닌 게 없구나. 무슨 사건이 터졌다 하면 뉴스시간에 시청자의 면전에 척척 던져대던 책들이 다 저런 책들 아니었니? 섬뜩하도록 붉은 글씨의 표지들은 보는 사람의 간을 덜컥덜컥 떨어뜨리고 내용 중 어떤 대목은 빨간줄로 죽죽 그어놓고 그 줄친 부분의 글씨를 읽을 수 있게 친절히 클로즈업 시켜주던 책들 말이다. 그런 걸 보면 정말로 저놈들이 빨갱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 (중략) … 「융이는 가택수색 받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닐테니까 책 때문에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광무가 말했잖아요. 너무 많이 잡혀와서 될 수 있는 한 내보낼 작정을 하는 것 같더라구요. 내일 아침이면 대체로 훈방될 거예요.」 「글세. 그렇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저 책들을 다 내다 버릴 수도 없고 참 난감하구나.」… (중략) … 「며칠전 융이가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절더러 오늘 융이네 집에 전화를 한번 해달라고 했어요.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어머니께 전해달라던데요. 걔 책상 아래 보자기에 싸놓은 물건을 태워버리시라고요.」 내가 융이의 친구와 통화를 채 끝내지도 않았는데 어머니는 곁에서 내용을 알아챘는지 벌써 융이의 방에서 보자기를 들고 나왔다. 지하실 연탄 보일러실로 내려가는 어머니를 나도 따라갔다.”
그런데 융이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은 이외였다. 융이가 경찰서에서 풀려나자 아버지는 꾸중보다는 할아버지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예를 들어 역사에 대한 지나친 죄의식과 희생정신이 오히려 역사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융이를 설득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융이는 양심에 따라 자신을 유폐시킨 할아버지가 더 큰 거인이라고 말한다. 부녀간의 대화는 예각화가 되지 않고 무화가 되었지만 정치적 현실은 민주와 독재의 일전이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그리운 거인들>에서 읽을 수 있듯이 80년대 후반 광화문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전경들에 의하여 항상 원천봉쇄를 당하는 광화문! 하지만 당시 광화문에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슬로건과 함께 민주세력이 집결해야 할 최종 목적지였다.
장두식<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80년대 광화문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장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