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 시장의 슬픈 그림자：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스물일곱 청년은 자신의 몸값을 바겐세일한다
가리봉동 오거리는 쪽방과 공장이라 두개의 공장으로 대표된다

가리봉 시장에 밤이 깊으면 / 가게마다 내걸어 놓은 백열전등 불빛 아래 /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마다 /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 ……(중략)…… //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리봉 시장을 찾아 / 친한 친구랑 떡볶기 500원어치, 김밥 한 접시, 기분나면 살짜기 생맥주 한 잔이면 / 스테이크 잡수시는 사장님 배만큼 든든하고 // …… (중략) …… // 하루 14시간 / 손발이 퉁퉁 붓도록 // …… (중략)…… // 가리봉 시장에 밤이 익으면, …… (중략)…… / 허기지고 지친 /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 싸구려 상품을 샘나게 찍어 두며 / 300원어치 순대 한 접시로 허기를 달래고 / 이리 기웃 저리 기웃 / 구경만 하다가 / 허탈하게 귀가길로 / 발길을 돌린다
박노해, 「가리봉 시장」(『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중에서

한국의 경제성장을 가리켜 ‘한강의 기적’이라고 자칭 혹은 타칭된 적이 있었다. 그 말의 골자는 ‘6·25전쟁이라는 내전을 치르면서 찢어지는 배고픔의 아픔을 딛고 한국인들은 신화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한국을 대표했던 한 자본가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로 표현했고, 또 다른 자본가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로 표현했다. 폭격에 끊어진 한강 인도교가 처연하게 서있는 6·25전쟁 직후의 한강변과 고층 빌딩이 강가를 따라 형성된 오늘날을 견주어 보면 우리는 적어도 외형적인 면에서는 선진국인 도시의 풍광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재벌들은 1960~70년대 폭력적인 정치 구조 하에서 정경유착을 통하여 자신들의 살을 찌울 수 있었다. 잡화상 수준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속 자본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이면에는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생활고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와 이들의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의 희생양인 농민이 존재한다. 이들은 위 자본가들의 삶의 철학과는 상반되게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했고, 그에 따른 실패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좁았던 만큼 할 일 또한 많지 않은’ 숙명적인 삶의 희생자들이었다.

물론 기회는 있었다. 그런데 그 기회라는 것이 겨우 입에 풀칠하는 자작농이거나, 남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에서 도시 하층계급으로 이입되거나, 저임금 노동자가 되는 것이라면 삶의 전기가 되는 기회라고 할 수 있을까 ? 빈곤의 농촌에서 탈출하여 앉을 수 있는 곳은 14시간의 과로에 시달리는 수출 한국의 대표주자 구로공단의 공장이었다.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며,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오는 긴 공장의 밤(「시다의 꿈」)’이 일상인 이들의 희망은 ‘할 일 많은 현실’이 아니다. ‘시다’에서 ‘미싱사’로, ‘재단 시다’에서 ‘재단사’로 이어지리라는 희망의 단순함은 ‘실패는 없다’고 하는 자본가와 한국 자본의 영광스런 성장을 위하여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나마 일자리가 있다는 것은 삶을 연명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바겐세일」의 화자처럼 ‘공단거리를 하루 종일 헤매지만, 스물일곱 청년에게조차 밥벌 자리 하나 없는’ 현실은 고용환경의 열악함을 보여준다. 10년 경력의 숙련 노동자임에도 일당 4000원이 아까워 그를 고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의 몸값을 바겐세일 한다. 그러나 그가 발 딛고 서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세일되는 노동자의 몸과 대비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물가안정을 강조하며 국민들의 금욕적 성실함을 강조하던 제5공화국은 거시적인 경제지표로만 삶의 질을 논했다. 그런데 실상은 ‘매주 4시간을 더 연장노동해도, 적자가계부는 흑자로 호전되지 않으며, 아내의 어두운 한숨과 프로야구장 · 프로축구장의 환호가 공존하는 현실’(「모를 이야기들」) 속에서 사람들은 세상사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푸념할 수밖에 없다. 1인당 국민소득의 숫자가 아무리 늘어난들 허리 한 번 펴보지 못하고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앞에 88올림픽과 정의로운 복지사회 구현은 실현되지 않는 마법의 주문인 것이다.
‘내일은 해가 뜬다’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는 궁핌한 현실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이다. ‘전력을 다 짜내어 뛰어도 갈수록 멀어져만 가는 황새를 뱁새걸음으로 따라 뛰며,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것’(「멈출 수 없지」)은 살아야 한다는 생존에의 본능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쪽방에서 공장으로, 공장에서 쪽방으로 오가는 반복된 생활을 이어 간다.
두 개의 공간을 오가는 지점에 가리봉동 오거리가 있었다. 그곳에 있는 시장은 허기와 애환을 달래는 공간이었다. 즉 수출한국의 위대한(?) 역군들이 소금땀 흘리던 구로공단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가리봉 시장은 그들의 한과 눈물, 희망의 공간이었다. 그곳은 고된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노동자들의 삶의 궤적이 남긴 그림자가 숨 쉬는 공간이었다. 그곳은 고향을 등지고 떠난 이들이 낯선 타향에서 동료들과 삶의 애증을 공유하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숙명적인 삶의 공간이었다.
선진조국 대한민국, 복지국가 대한민국의 구호 아래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회한은 공단 옆 안양천의 안개 속에서 ‘더러움과 오욕에 뒤섞여 거칠게 살얼음을 뒤척이며 어두운 겨울 속으로 봄을 부르며 흐르는 눈물’(「한강」)로 변해 소리 없이 흘러갔다. 이들의 침묵은 또 다른 침묵을 낳았지만, 한강의 거슬러 올라오는 밀물이 되어 1987년 한국사회민주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김재관<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

▲ ‘한강의 기적’ 이면엔 안양천을 따라 노동자들이 회한을 토한 오물이 흘렀다.
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