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저문 날의 삽화」4：(창작과 비평, 1987. 7)


짙은 회색 스텔라를 타고 성묘온 종질(從姪)들
집안의 어른은 주눅들고, 이내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한다


남보다 돋보이기 위한 방편으로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일까? 물론 위의 것 중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은 제외될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봐도 개인, 민족, 국가를 막론하고 타인(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은 자신만이 갖고 있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서 부각되었다. 타인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한 사회가 공인하는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강한 소유욕을 유발할 것이다. 또한 그것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사회의 주류계급에 편입되었음을 상징한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계급에 따라 그들의 상징물이 정해져 있었다. 같은 양반계급이라도 품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재질이 정해져 있었다. 특히 그 물건들이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신분을 과시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신분제의 붕괴는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물리적 상황을 제공했다. 물론 이런 변화된 환경에서 힘의 원천은 ‘돈’이었다. 근대 이후 눈 나쁘지 않은 자가 금테 안경을 끼고, 다리 아프지 않은 자가 단장을 짚었던 상황은 이들 물건들이 실용적인 측면에서만 소용되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양(洋)’이란 이름이 붙었던 물건을 소유했다는 것이야말로 소유가 곧 지배적 계급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럼 1903년 하나밖에 없는 고종황제의 어차(御車)였던 ‘자동차’는 80여년이 지난 후 한국인의 일상에서 어떤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박완서의 「저문 날의 삽화」4(『창작과 비평』, 1987. 7)는 1980년대 서울 사람들의 일상에서 자가용이 갖는 의미를 보여준다. 1980년대말 ‘마이카’라는 상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국인들의 재산목록 1호로 꼽는 것은 ‘집’이었다. 한 칸짜리라도 자신의 집을 소유했다는 것은 고단한 인생에서 한 고비 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서울에 집 한 채 갖고 있다는 것은 타향에서 자리 잡았음을 대외에 과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른 이후, 집과 함께 한국인들의 일상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자가용’이 추가된다. ‘마이카’로 상징되는 중산층의 자가용 구입은 자신의 지위를 과시코자 하는 의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1970~80년대 초등학교 아이의 신상명세서에 자랑스럽게 자신들이 소속된 계층으로 기재했던 ‘중산층’을 증빙할 수 있는 것 중 자가용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상징물이다. 이전에 ‘김장 몇 포기’, ‘월동용 연탄 몇 장’ 등으로 우월성을 인정받던 시절과 비교가 되지 않는 가시적인 물건이 자가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등장한 ‘자가용’은 타인 앞에서 자신을 한껏 뽐낼 수 있는 상징물이 되었다. 특히 어떤 자가용을 갖고 있느냐는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가시적으로 드러냈다. 편의적으로 ‘소형차, 중형차, 대형차’로 삼등분되었지만, 어느 회사의 어떤 차종을 샀느냐에 따라 자신의 지위도 덩달아 결정되는 느낌은 자동차 구입가격만큼 직접성을 지니고 있었다.

“맏물 고추처럼 순전한 빨간 빛깔의 르망, 짙은 회색의 스텔라, 군청색의 프레스토, 흰색 맵시”를 타고 성묘 온 종질(從姪)들 앞에서 집안의 유일한 어른이었던 남편은 주눅이 든다. 지난해까지 서울 근교의 선산에 택시를 대절해서 성묘하러 오면서 조카들의 자녀들을 무릎에 앉히고 의기양양했던 남편은 산소 앞까지 차를 끌고 올라온 조카들의 기세에 의기소침해진다. 그런데 서울에서부터 선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내고 택시를 대절할 수 있다는 것으로 아래 항렬들에게 어른임을 각인시켰던 남편은 조카들의 자가용 구입으로 그 지위가 흔들린다. 설이나, 추석 성묘에 종질들에게 지난한 예법을 강요하고 잔소리함으로써 종숙(從叔)으로서의 위상을 강조했던 남편은 조카들이 자가용을 끌고 오자 돗자리 한편에 걸쳐 앉았다 일찍 자리를 뜬다. 자가용이 없다는 것이 그의 어깨를 움츠리게 했던 것이다.
추석 성묘에서 돌아오자 그는 운전학원에 등록하고 자가용을 장만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필기시험은 한 번에 통과되었지만, 실기 시험은 몇 번씩 낙방한 끝에 면허를 딴다. 내친 김에 시내 연수를 마치고 그는 노년의 성찰적 자세를 포기하는 대가로 결국 중고차를 구입한다. 종질들의 차에 빗댈 수는 없지만, 자기만의 차가 생겼다는 것은 서울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을 벗어나게 하는 동인(動因)이 된다. 정년퇴직한 이후 단조로웠던 남편의 일상은 자가용의 구입과 함께 동선(動線)이 변화된다. 이 때 차는 남편의 발이 되기도 했지만, 거꾸로 차는 남편의 의지를 넘어서는 활동 신경이 되었다. 즉 ‘손발로는 운전을 하면서 한편 온몸의 감각과 신경을 외부로 발사해야만 하는 환경에서 남편’에게 차와 구분된 운전자라는 개념은 무의미한 것이다.
기계치였던 남편은 ‘새로 생긴 가락시장에 싱싱한 생선을 사러가자는 둥’, ‘곗날 운전기사가 돼주겠다는 둥’ 차와 자신을 일체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서울에서 분기탱천하여 자가용을 산 이가 남편뿐이었을까? 서울의 교차로에는 남편처럼 다른 이의 자가용 구입에 자극받아 차를 산 이들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耳順)이 지난 초로의 노인이 지닐 수 있는 덕성은 이런 상황 속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운동감각이 떨어지는 중년 이상의 연배를 향해, 남성은 여성을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품성의 밑바닥을 드러내게 한다.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80년대 말까지 재산목록 1호는 집이었지만 이후 ‘차종’이 추가되었다.
김재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