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 - ‘인정’의 문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행복’을 팔던 곳
에누리, 외상 눈빛만으로도 통하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구멍가게는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쉼터요. 중심이었다
대형마트와 인터넷 상점의 등장으로 구멍가게는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따뜻한 봄볕이 기지개를 편다. 쌀쌀한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 움츠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을 어귀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다. 한번 휘-이 돌아보면 더 볼 것도 없을 만큼 작고, 남루하지만 그 곳에는 없는게 없다.
아이는 오늘도 어머니의 심부름에 마지못해 신발에 발을 끼워넣고는 구멍가게로 향했다. 언제부터 여기에 이 가게가 있었던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꽤 오랜 세월동안 가게는 마을 앞을 지키는 나무처럼, 굳건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작은 가게에 들어서자 몽당연필을 귀에 꽂은 주인 아저씨는 주판알을 튕기고, 주인 아줌마는 먼지털이로 여기저기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주인 아주머니의 두꺼운 국방색 앞치마는 허리에서 무릎을 가릴 만큼 큼직했고, 주머니가 여려겹으로, 고액권은 안쪽에 동전이나 잔돈을 바깥쪽에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가게에서 파는 상품이 대부분 저렴해서 그 앞치마에는 항상 고액권보다 잔돈이 더 많아다. 움직일 때마다 동전이 철렁거리는 앞치마는 그 무게 때문에 아래가 축 처졌고, 처진 부분이 닳아 흐늘흐늘 거렸다. 어머니가 사오라는 밀가루를 손에 쥐고 보니 형형색색의 노리개 같은 사탕과 껌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먹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돌아서야 했다. 자주 그랬듯 “어머니가 나중에 돈 가지고 올 꺼에요”라고 말하고 가게를 나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주인 아주머니는 그것이 공공연히 외상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가게 앞 평상에는 동네 어른들이 모여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다. 늘 보는 얼굴들인데도 무엇이 그리도 반가운지 서로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 정답게 서로 안부를 묻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기뻐하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입에 걸린다.

구멍가게는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마을사람들의 중심이 되는 쉼터요, 사랑방이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구멍가게는 마을 초입에 위치해 마을회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게 위의 작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소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주었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이들은 단골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꿰뚫고 있어야 했다. 누구네 살림살이는 어느정도고, 부부 사이는 좋은지 나쁜지, 아이들은 몇 명인지, 공부는 어떻게, 행실은 어떤지 등등. 그 시절의 구멍가게는 동네 사람들이 자연스레 친해지는 대화의 장(場)이기도 했다. 동네 돌아가는 사정이며, 누구누구네 집안일이며, 남의 흉이나 자랑거리, 경조사 등이 구멍가게를 통해 온 동네에 퍼지곤 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요즘보다 더 끈끈한 정으로 엮여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또 대부분의 거래가 외상으로 이루어질 만큼 손님과 주인 사이에 허물이 없었다. 코묻은 돈으로 눈깔사탕이나 쫀드기 과자를 사먹었던 아이들이 물건을 훔치기라도 하면 붙잡아선 ‘먹고싶어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당부하며 캐러멜을 나눠주던 구멍가게 아저씨의 후덕한 인심은 구멍가게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것이었다.
구멍가게라는 이름은 한국전쟁 직후 강도가 들끓던 시절, 구멍을 통해 물건을 사고판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렇게 부르던 말이 조그맣게 소매점을 하는 가게를 일컫는 통상적인 말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주위에서 구멍가게는 추억의 편린이 되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이런 구멍가게의 풍경을 바꿔놓은 것은 대형 할인점과 편의점이다. 예전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면서 사람들은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작은 구멍가게에서 충족할 수 없는 소비심리는 점점 더 큰 대형마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구멍가게와 달리 대형마트는 먹을것에서 입을 것, 읽을 것까지 모두 한곳에서 장을 볼 수 있다.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넓고 깨끗하고, 환한 매장. 구멍가게보다 싼 가격에 물건도 깨끗하고, 좋은편이다. 그러나 대형마트들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격이 싼점을 이용해 낱개 판매보다는 여러개를 묶어놓아 팔기 때문에 반 강제적으로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양을 사야한다. 또 대형마트는 충동구매를 부추긴다. 편리함을 추구하다보니, 반찬이며 김치, 씻어놓은 쌀까지 아무 거리낌없이 카트에 싣는다. 원산지 표시 또한 보기좋은 포장들에 의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중국 고춧가루가 되었든, 일본 전자제품이 되었든, 베트남 나무주걱이 되었든 일단 카트에 실어놓으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꼭 필요치 않아도 보기에 예쁘고, 맛이 좋아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는다. 꼭 필요한 물건만 적어 가지고 나가서 시장을 보는 재래시장이나 밥을 짓다가 구멍가게로 뛰어가는 모습이 훨씬 정감있고, 아름답고 경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구멍가게가 우리의 오랜 친구 같은 다정한 존재였다면, 대형마트는 인스턴트 같은 존재인 것이다.
구멍가게를 위협하는 것은 대형마트 뿐이 아니다. 요즘은 인터넷에 수백가지의 상점들이 있어 바쁘고, 번잡한 현대인들에게 편리를 도모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인터넷 속에서 상인을 만나지 않고 흥정이랄 것도 없이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면 물건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을 뿐 아니라, 배달까지 된다. 물건의 감촉도, 향기도 느낄 수 없고 모니터 속의 이미지 만을 보고 편하게 물건을 구입하는 문명의 혜택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우리들이다. 그렇다보니 동네 주민을 상대로 담배나 식품, 생필품 등을 팔던 ‘서민의 벗’ 구멍가게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구멍가게식 운영’이니 ‘구멍가게만도 못한 경영’이니 하는 비유의 대상이 될 정도로 홀대를 받아왔다. 흔히 구멍가게로 불리는 서울의 ‘기타 음·식료품 위주 종합 소매업체’는 1999년 말 2만 5백39곳이던 것이 2001년 말 1만 8천3백95곳으로 10% 감소했다. 전국적으로는 1997년 말 14만 2천9백35개이던 것이 2001년 말 11만 1천8백88개로 20% 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올 초 영국 더 타임스는 대형 할인점에 밀려 구멍가게가 한 해 2천개씩, 15년 내에 역사 속으로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래서일까? 구멍가게를 찾아 취재를 나섰지만, 구멍가게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네에 작은 구멍가게들조차 예전의 모습을 벗고 더 큰 가게터에 자리를 잡고 대형 할인점이나 편의점처럼 깔끔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꾸미고 있었다. 외딴 시골마을을 찾아 한참이나 지났을까. 겨우 찾은 구멍가게는 간판도 없고, 화려한 외관도 없는 이곳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아직도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 잔을 돌리며 사람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 누구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나눌 수 있는 곳. 칸칸이 나눠져 있는 닭장같은 아파트 속에서 오로지 나, 나의 삶, 나의 가족만 알던 편협한 사고가 이 곳에는 없었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가 닿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시골 구멍가게도 대형마트로 인해 예전보다 장사가 안된다고 하니 무서운 약육강식의 세계는 이곳마저 잠식하고 있었다.
불혹이 넘어 처음 책을 낸 동화작가 정근표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구멍가게’에서 구멍가게는 ‘빈곤 속의 풍요’를 파는 곳이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행복을 파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어느 대형마트와 인터넷 쇼핑몰도 흉내낼 수 없는 인정과 사람사는 맛이 숨쉬고 있는 그곳. 어쩌면 우리는 그 속에서 물건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인정’과 ‘사랑’까지 함께 덤으로 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직 경제적인 원리와 편리만이 가득찬 도시의 대형마트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행복을 팔던 구멍가게가 그리워지는 것은 지금은 어디서도 쉽게 살 수 없는 ‘인정’에 대한 그리움은 아닐까.

<허유나 기자> yunari86@dankook.ac.kr

▲ 구멍가게는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 초라한 냉장고 속에 막걸리가 가득하다.
허유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