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서울 광화문 네거리의 진풍경：강석경의 <맨발의 황제> 읽기
자본논리에 길들여진 80년대의 사회
소외되는 주인공 태경은 광녀(狂女)가 부러웠다
강석경의 <맨발의 황제>는 80년대 소시민의 생활을 세밀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민태경은 월간잡지사 수석기자였다. 그가 다니는 잡지사는 새로 창간한 여성지 <GG>였다. 신군부에 의해서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 등 의식 있는 교양잡지들이 강제로 폐간당한 후 출판계에는 대중잡지들이 백화제방처럼 쏟아져 나왔다. 특히 주간지와 여성지들이 “33년을 지킨 나의 처녀성을 팝니다, 연하의 정부를 고소한 스타 ㅅ, 현지처의 진상” 등과 같이 선정적인 기사나 소비지향적인 내용을 가지고 독자들을 유혹하였다. 프로야구, 칼라 TV 등 신군부의 3S정책에 따라 당시 대중문화는 70년대보다 다양해졌고, 훨씬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대중교통수단도 지하철이 시내버스와 택시를 누르고 서서히 시민의 발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뚜띠띠따따따 따아’라는 지하철의 기적소리가 마치 귀신의 울음소리 같다는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지하철이 곧 지옥철로 변신하리라는 것이 감지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지하철은 시커먼 매연과 차장의 악쓰는 소리와 함께 달려야 하는 시내버스보다 재빠르고 날씬한 문명의 이기였다. 지하철 안의 정경 또한 요즘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한결같이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약간의 승객들은 사람들에게 부딪히면서도 <일간 스포츠>를 들여다보고 있다……한 사람이 신문을 보고 있으면 옆 사람의 눈길도 자연 신문으로 향한다. 오른편에 선 남자는 「일지매」를 열심히 들여다보고……한 중년부인이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잠시라도 못견디는 사람이 있는데 그녀 표정이 바로 그렇다……그 옆의 남자는 그것을 흘끔 보다 설친 아침잠을 메우려는 듯 눈을 감는다.” 당시 사람들도 요즘과 같이 시테크와 같은 근대시간 개념을 가지고 살았다. 사람들은 조금만 틈이 생기면 불안해하고 하다못해 <일간스포츠>의 연예란이라도 보면서 시간을 메우려 했다.

태경은 지하철 안에서 옛날 과외 제자 윤도를 만나 그의 변모에 조금 우울해하고, 지하철에 등장한 광녀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목적지인 작가 ㅈ여사의 집에 도착한다. 아내의 은사이기도 한 ㅈ여사는 태경을 집안에 들이지도 않고 가정부를 시켜 원고를 내준다. 원고 수거하러 다니는 잡지사 기자가 싫으면 원고를 주는 저명인사가 되라는 자조가 상투적이 되어버린 태경의 생활이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야식비조차 지원을 받지 못하는 부조리에 한마디 말도 못하는 태경은 투철한 생활인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현대사의 격동기였던 80년대는 아이러니하게도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호황기였다. 재벌중심의 한국 자본주의는 점점 공고해지고 있었다. 자본논리가 지배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소시민들의 삶은 점점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태경은 이러한 생활에 서서히 적응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 2호선이 서울을 순환하듯 서울시민들도 자기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출구도 없고 사이 길도 없는 그런 생활의 악순환이었다. 사진부 최성호기자와 함께 공장을 들어가기 위해 택시를 탔지만 택시는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고물택시였다. “차를 잘못 탔구만. 털털거리는 데다 또 쑥탕이니, 한강만 아니었다면 익어 죽을 뻔 했네”라는 최기자의 너스레에 택시기사는 이런 차를 온종일 몰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모두들 밥줄 때문에 살아가는 인생들이었다. 최기자의 말 속에서 한강이 당시 서울시민들의 심리에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가를 읽을 수 있다. 한강은 태경이 “제 1한강교에 들어서자 제법 선들한 바람이 불어왔다”라고 느끼듯 꽉 막힌 서울사리에 지친 시민들의 숨통을 열어주는 심리적인 기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공장에서 일을 끝내고 좌담회 약속이 잡혀있던 광화문에 도착한 태경 일행은 좌담 장소인 호텔로 갈 수가 없었다. 민방위 훈련 때문이었다. “사이렌이 불자 행인들은 걸음을 재촉했고, 완장을 찬 민방위 대원이 곳곳에서 호르라기를 불었다……수십대로 밀려 정차한 버스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주위 행인들이 모두 지하도로 몰려갔으므로……텅빈 거리로 막 백색의 사이카가 달려다. 그 뒤로 통제 깃발을 단 군용 과 검은 승용차가 따라고 있었고 민방위 보도 취재반의 방송 이동차가 그 옆으로 천천히 달려갔다.” 거리에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진풍경이 또 다시 연출된 것이다. 서울 거리를 걷다가 사이렌소리에 전쟁이 난 줄 알고 혼비백산했었다는 외국인들의 경험담도 있듯이 민방위 훈련은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해프닝 중에 단연 일미였다. 프로이트의 반복강박 이론을 성실하게 따르는 정책 때문에 서울시민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분단과 전쟁 상황을 직접 체험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시민들은 일상생활만이 아니라 내면 심리세계마저 철저히 통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최기자를 따라 비각 뒤의 폐쇄된 예총회관 건물로 올라간 태경의 눈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향해 달리는 광녀가 포착되었다. 텅 빈 세종로를 맨발의 광녀가 질주하고 있었다. 태경은 이러한 진귀한 장면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맨발의 광녀가 이상하게 두려웠던 것이다. 광녀는 사회에서 일탈한 자의 상징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민방위 훈련 해제 사이렌을 들으며 나서는 태경에게 최기자가 어디를 가냐고 묻자, “작가의식은 있어도 직업의식은 없군. 좌담해야죠”라고 대답한다. 태경의 대답 속에서 자본의 순환구조 속에 철저하게 매달려 살아야 하는 소시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장두식<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당시 서울 시민들은 민방공훈련을 통해 일상생활만이 아니라 심리세계까지 통제받고 있었다.
장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