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바로보기 - 서울여성영화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여성주의 시각의
확산을 목적으로 시작

누군가에겐 낯설고
불편하겠지만



사람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고민하게 되는 시기가 있다. 당연하게 보였던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낯설게 보이고, 편안하기 그지없던 일상이 불편하고도 어렵게 느껴지는 순간. 자신이 ‘안다’ 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성해보는 시간. 사춘기때 겪었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다시 한번 온 몸으로 앓게 되는 그런 경험. 내게도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 스무 해 넘게 생물학적 여성으로 살아온 내가 ‘여성’이라는 테마에 깊이 몰두하게 된, 새삼스럽기 그지없는 그 일이. 일종의 개안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사유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하나의 언어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 시기가 내 삶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성으로서 자라온 이력에 섞여있는 일상적 폭력과 그 흔적들, 사소하거나 심각했던 차별들, 몸으로 경험한 어떤 고통들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들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하는 순간, 그리고 타인에게 ‘커밍아웃’하는 순간 나를 향한 편견과 의심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은 남자들을 배제한 편협한 이론이 아니냐, 남녀평등이 이루어진 이 좋은 시대에 왠 불만들이냐, 전통을 파괴하고 인류존속을 저해하는(저출산에 대한 오해인듯) 여자들 아니냐 등등.(저항은 낭만적이라기보다 고통스러운 과정들임이 분명하다)
봄바람이 황사에 섞여 몰려오던 지난 6일, 한동안 지쳐있던 나는 물론이거니와, 주변의 언니들을 모처럼 신바람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올해로 여덞번째를 맞는 <서울여성영화제>가 개막한 것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슬로건을 내건 <서울여성영화제>는 세계 여성영화의 흐름을 보여주고, 문화생산의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여성주의 시각의 확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 1997년 대학로에서 시작된 이 영화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와 내실을 튼튼히 하며 관객과 영화인들에게 폭팔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아프리카 대륙 등 33개국의 영화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번 영화제는 97편의 영화를 상영하며 관객 점유율 평균 92.1%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영화 외 행사로 여성의 생식력을 둘러싼 국가와 문화권력에 대한 국제포럼과 프로&아마추어 여성예술인들의 야외 미니축제도 열린다.

<서울여성영화제>의 상영작들은, 말 그대로 ‘여성영화’들이다. 폭력과 부당한 차별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도와주는 아프리카 카메룬의 여성 판사와 검사, 레즈비언 혼혈소녀가 여성복싱선수로 살아가면서 겪는 세상과의 싸움, 70년대 우리나라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삶, 성매매 여성들의 파업과 낙태에 관한 여성들의 주체적 저항들까지,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이 영화들은 여성들의 삶을 다양하고도 세밀하게 조명하고 있다.
이미 국제적인 영화제로 자리잡은 <서울여성영화제>는 단순한 영화상영을 넘어 여성영화의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지나온 역사를 재구성한다. 60년대 미국 대항 영화의 선구적인 작업이 되었던 ‘뉴스릴운동(newsreel movement)’속에서 성장한 페미니스트 다큐멘터리와 <안토니아스 라인>으로 국내에 알려진 감독 ‘마를린 호리스’의 특별전, 여성의 관점으로 과거의 한국영화를 새롭게 읽는 ‘한국영화 특별전:여성, 민중, 코리안 뉴웨이브’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상투적이고 상업적인(상업적이지 않은 영화가 어디 있으랴만은) 영화에 길들여진 대다수의 영화관객들에게 이 영화들은 조금 낯설지도 모른다. 남성중심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누군가들에게는 몹시 불편한 주제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들의 삶에 한번쯤 귀를 기울여보고 싶다면, 그들이 무엇에 분노하고 어떠한 삶을 원하는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다면, 이 축제판은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어줄 것이다. 실제로 ‘페미니즘’에 별 관심이 없는 여성들에게도, 페미니스트는 편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축제는 열려있다. 슬로건이 무엇이든, 우리는 최소한 살아있는 인간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예의를 갖추고 있지 않은가.
<제 8회 서울여성영화제>는 오는 14일 금요일까지, 신촌 아트레온에서 열린다.
이진주<국문·3>
pearl2891@hanmail.net

▲ 제8회 서울여성영화제가 오는 14일까지 계속된다.
이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