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아닌 그곳-<언니네방>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성폭력’이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침묵을 지켜야 하는 금기 였기에 고통이었다

대단치 않은 삶 속에서 내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말과의 투쟁이었다.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언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말의 넘침 속에서 나의 언어는 언제나 불안했다. 그것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들의 경계에 대한 고민이었다. 지금도 내 삶에 생채기를 내고 있는 어떤 기억들-‘여성’이기에 당해야 했던 폭력에 관한 고통은, 그것이 ‘성폭력’이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침묵을 지켜야 하는 금기 때문이었다. 비밀은 그것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비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비밀을 편견과 사심 없이 진심으로 들어줄 귀가 없기 때문에 비밀이 된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스물 몇 해를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언어는 그 자체로 권력이며 힘이라는 것이다. 숨막히는 일상적 투쟁 속에서 나는 보석같은 공간, 그 자체로 빛이 나는 책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사이버 공간에서 여성들끼리 소통하고 교감했던 ‘언니네’와,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언니네방>이 그것이다.
‘언니네(www.unninet.net)’는 4만여명의 회원들(남성회원도 다수이다)이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며, 내면 깊숙이 숨겨두었던 비밀을 풀어내고 여성주의적 문화와 담론을 만들어내는 사이버 공간이다. 2000년 문을 연 이곳은 “여성들이 사이버 공간에 둥지를 틀어온 과정을 보여주는 산 역사”(‘정보트러스트 어워드 2005’ 수상 이유)라는 평가를 받으며 여러차례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매달 ‘월간 언니네’를 통해 사이버 언론으로서의 역할과, 여러 가지 문화 컨텐츠를 통해 영화·만화·문학·미술 등에 관한 수준높은 담론을 만들어내는 이곳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공간은, 회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언어를 풀어내는 ‘자기만의 방’이다. 지난 3월 출간된 <언니네방>은 언니네 사람들이 ‘자기만의 방’에 털어놓은 이야기 중 지난 5년간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로 묶인 책이다.

<언니네방>은 여성들이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 숨겨왔던 욕망과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치유받는 장이다. 성·사랑·삶, 그리고 무수한 일상속에서 겪는 여성들의 산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글의 저자는 바로 ‘언니네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당한 성폭력 경험을 이야기하고 다시 살아나며, 가정과 직장, 사회 구석구석에서 당한 모욕과 부당함을 폭로한다. 성정체성에 관한 고민들과 비혼여성으로 살아가는 고초, 몸을 억압하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저항, 숨겨두었던 섹스와 자위에 관한 욕망이 절제된 언어와 진솔한 서술로 어우러져 있다. 성폭력 생존자, 레즈비언, 비혼 여성, 장애여성, 가난하거나 유능한 여성, 살아 있는 여성으로서의 외침은 단순한 폭로나 불만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치유하고 타인을 어루만진다.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가득찬 그녀들의 언어는 용감한 만큼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더욱 강하다.
용감하게, 지혜롭게, 따뜻하게 들려주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삶 또한 풍요롭게 만든다. 그녀들은 화끈하게 분노하고, 소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즐기며, 지구와 공존하는 삶과 모든 폭력에 맞설 것을 권하고 격려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들만의’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우리들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자칫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인 이야기들은, 그러나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를 조명하고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슬로건은 여기에서 힘을 발휘한다. 삶, 그 자체가 바로 우리들의 문화와 사회, 모든 정치구조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하는것으로부터 세상에 대한 애정이 생겨난다는 것을 그녀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그리고 남자로 산다는 것), 비혼으로, 이반으로, 장애인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살아있는 보고서이다. 차별과 편견을 벗어난 그녀들의 담론은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고 값지다. <언니네방>-지은이 언니네 사람들, 2006, 갤리온.

이진주<국문·3> pearl2891@hanmail.net

▲ 가정과 직장, 사회 구석구석에서 여성들이 당한 모욕과 부당함을 폭로한다.
이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