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백년간 지켜온 터전엔 개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4촌에서 6촌, 멀게는 12촌까지 모여사는 이곳에는 이제 15가구 밖에 남지 않았다
양원마을에
들어서자
집집마다 ‘鄭 ’이라는
문패가 있어
한눈에도
집성촌임을 알 수 있었다

19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면서
집성촌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한마을이 한 집안으로 이뤄져 있는 집성촌(集姓忖)은 이제 인구 1천만의 대도시 서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그나마 7군데 정도 남아 있다는 서울의 집성촌도 점점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개발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어져 가고 있다.
지난 19일 집성촌 취재를 위해 서울 하일동에 가장 큰 규모로 위치해 있다는 청송 심(沈)씨 집성촌을 찾았다. 어렵게 찾아간 그곳은 개발로 인해 잔뜩 파헤쳐져 있었다. 쓰러져가는 비닐하우스와 낡은 집만이 사람이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동사무소에 문의해 보았지만 마을의 이름도, 정처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청송 심씨의 집성촌이 이 지역에 있다는 것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행정적으로도 전혀 파악이 안 되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허망하게 무산된 취재를 뒤로하고 다음날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래(東萊) 정(鄭)씨 집성촌을 찾았다. 개통된지 얼마 안 되는 깨끗하고 화려한 양원역에 내리자마자 시선에 잡힌 것은 구릉위로 펼쳐진 과수원이었다. 서울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언덕을 넘어가니 작지만 한눈에도 오래된 듯한 마을이 보였다. 집집마다에는 ‘鄭00’이라는 문패가 달려 있어 한눈에도 일가 친척이 모여 사는 집성촌임을 알 수 있다. 마을 초입에서 동래 정씨 28대손이라는 마을 이장 정문섭(66) 씨를 만나 동네의 유래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망우동 ‘양원리(養源里)’ 동래정씨는 서울시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집성촌으로 6백여년 전부터 17대에 걸쳐 모여 살고 있는 집성마을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12대조인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矩 1350~1418)가 정착한 이후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정구는 고려말 조선초의 왕조가 바뀌는 정치적 혼동 속에서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고자 조선왕조의 도읍인 한성에 들어오지 않고 경기도 양주의 송산에 머물면서 중국 은나라가 망할 때 지조를 지킨 기자(箕子), 비간(比干), 미자(微子)의 삼인(三仁)과 고려의 두문동(杜門洞) 현인과 행동을 같이 하였고, 태조·태종과의 우정을 지켜 출사하여 시대 상황을 포용하는 면모를 보여준 인물이었다. 특히 이 마을에는 망우리 고개의 명칭이 생기게 된 전설과 관계있는 우물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가 지금의 동구릉에 사후의 명당 자리인 건원릉을 정하고 돌아오는 옛 망우리 고개를 넘다가 갈증이 생겨 이 곳 우물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어찌나 좋은지 이 샘물을 양원수(養源水)라고 이름을 붙여 준 뒤부터 마을 이름을 양원리라고 하였다 한다. 현재의 양원리 우물은 이 마을의 밭 가운데 남아 있기는 하지만, 농약의 사용과 주택이 늘어나면서 수질이 오염되어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으며, 당시처럼 물이 샘솟지도 않는다. 태조 이후 현재의 망우리 고개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이곳 양원리를 통해 동구릉으로 가는 왕들의 능행로가 있었으나 일제 때 경북궁과 동구릉을 이어주는 능행로의 맥을 끊기 위해 중앙선을 만들었다는 설이 전하기도 한다.
마을의 유래며, 조상들의 영웅담을 한참 재미나게 이야기 해주시던 정문섭 할아버지는 직접 비석을 보여주시겠다며 앞장서셨다. 집 뒤편을 따라가니 마을 앞산 위로 무덤들과 비석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누구의 묘인가 여쭈어 보니 이곳에는 설학재 정구의 첫째 부인인 큰할머님 묘를 비롯, 17대조 이하 조상님들 묘소가 모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임금이 직접 만들게 했다는 비석에서 곳곳에 세워져있는 돌장승은 마치 민속촌에라도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조금 더 올라 작은 앞산의 정상에 올라서니 옹기종기 웅크리듯 모여있는 작은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앞집, 뒷집이 모두 4촌에서 6촌, 멀게는 12촌까지 있다는 마을에는 이제 15가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50여가구 정도 모여 살았다는 옛날을 회상하시던 할아버지는 그 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옛날에는 정말들 많이 모여 살았지. 가을에 음력 10월 2일 시제를 모시는데 어렸을 때 제사를 한번 지내면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지내곤 했지. 할아버지, 할머니 한 분 한 분 절하고 다녀야 했으니, 아이구…….” 또 설이나 추석 명절에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웃어른께 인사를 드렸다. 이추자(63) 씨는 “처음 시집왔을 때 폐백을 드릴 분들이 너무 많아서 5촌까지만 했던 기억이 난다”며 “명절 때면 할아버지·할머니들께 절하러 다니느라 고생깨나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함께 살기에 더 좋은 일들도 많았다. 어느 집에 경조사가 생기면 모든 정서방들이 달려가 함께 일해주고 기뻐하고 슬퍼했다. 기쁨을 함께 나누고, 슬픔은 서로 덜어가면서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온 날들이었다. 한 피붙이다 보니 서로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도 웬만한 건 다 꿰차고 있다. 29세손인 정진섭(63) 씨는 “숟가락이 몇 개, 젓가락이 몇 개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고, 개가 지나가도 누구 집 개인지 알 정도”라며 웃었다.

우리나라에 집성촌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농경이 일찍 발달하여 정착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선사시대로부터 거주단위를 씨족중심으로 이루어 살아왔고 공동체적인 생활을 했다. 또한 상공업이 발전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산업이 농경산업 중심이었기 때문에 항상 노동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조상은 두레, 품앗이, 계 등을 만들어 협동정신을 발휘했는데 이런 관습은 씨족사회가 아니면 유지되기 어려웠다. 또 교통과 통신의 문제도 있었다. 과거 교통과 통신이 요즘처럼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엔 사람들의 시야가 좁았기 때문에 타지역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자신의 친족과 격리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고립을 의미했다. 이런 경우 배타적인 타 씨족의 차별을 감수해야 했고, 협동 문화에서도 배제되기 때문에 자신의 집성촌을 떠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의 정체성은 자신의 성씨로부터 출발하고 있었고 성씨의 고향인 집성촌은 그의 정체성의 제도적 기반이었다. 따라서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대부들도 사직 후에는 꼭 낙향을 하였고 사후에는 선산에 묻히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 그리고 산업화에 의한 도시화로 인해 집성촌의 개념이 예전보다 많이 퇴색되었다. 집성촌이 무너지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 과정이었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급격히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큰 아들은 서울로 유학을, 누나는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도시 근처의 공장으로 취직을, 오빠는 기울어지는 가세를 일으켜 보겠다고 돈을 벌려고 도시로 향했다. 이처럼 60~70년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집성촌을 버리고 도시로, 도시로 향했다. 이처럼 사회가 도시화되고 핵가족화 되면서 친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명절 때조차도 친척들이 함께 모이기가 힘든 것이 요즘이다. 하물며 내 옆집, 내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데 오죽하겠는가.
그나마 양원마을이 집성촌으로서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은 6·25전쟁 당시 피란민이 몰렸을 정도로 외진 위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일대가 1970년 초부터 개발제한지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은 요즈음 웬만한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60·70년대 농촌마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논밭만이 있었던 양원마을 아래에 1965년 송곡 고등학교가 들어서고, 그 주위로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일대가 차츰 개발되기 시작했다. 또한 사람들도 일자리를 찾아 하나 둘 씩 이곳을 떠나가고, 함께 관리하던 문중 재산도 다 팔고 나눠서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이 마을에는 60대에서 80대의 노인들만이 남게 된 것이다. 하루 종일 함께 모두 모여 지내던 제사도 이제 편의에 맞게 4~6촌까지 나눠서 지낸다.
정문섭 할아버지는 “이제 세상이 변했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매일 복닥거리며 살다가 요즘은 오랜만에 만나니 더 반가운 것 같기도 해” 라며 웃으시더니, “이제 여기도 개발제한이 풀리면 머지않아 아파트가 들어설 거야. 저기 건너에도 벌써 임대 아파트들이 생겨나고 있거든……”하시며 아쉬운 눈길을 보내셨다.
할아버지가 가리킨 저 멀리에는 위협하듯 아파트가 우뚝 솟아있었다. 아파트들이 자라나고 시끄럽게 북적거리는 저곳과 달리 작고, 조용한 이곳은 마치 딴 세상 같았다.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옛 자취와 아른한 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곳은 잊지말아야 할 것들을 모아놓은 다른 의미의 집성(集成)촌이기도 했다.

▲ 망우동 양원마을 ‘동래정씨’ 집성촌 모습.
▲ 화려한 양원역(위 좌)과 대조적인 마을어귀(위 우)의 모습과 마을 앞산에 모셔져 있는 조상들의 묘소와 비석(아래).
허유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