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서울75 네 이웃의 진실을 아느냐? 박완서의 <무중> 읽기
모래의 성 아파트는 익명성을 기본으로 지니고 있다
그녀는 옆집 베란다로 건너가 ‘김철수’를 보며 맞아주기를 갈망한다

80년도에 들어서면서 서울은 아파트 세상이 되었다. 주거공간이 아파트로 바뀌면서 시민들의 문화도 급격하게 변모했다. 조세희가 <민들레는 없다>에서 잠실 아파트와 모래와의 상관관계를 형상화한 것처럼 아파트의 주성분은 모래였다. 철근과 시멘트가 없으면 결코 뭉치려고 해도 뭉칠 수가 없는 모래. 아파트 문화의 특성은 파편성과 익명성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아파트에 살게 된 한 여인의 이야기가 박완서의 <무중(霧中)>이다.
주인공 ‘나’가 한강변의 맨션아파트에 살게 된 것은 순전히 아빠 덕분이었다. 여기서 아빠는 친아버지가 아니라, “나를 귀여워해주고 놀고 먹도록 돌봐주는 친절한 남자”를 지칭한다. 그녀는 무작정 상경한 젊은 여성이 서울에 정착하는 방법 중 가장 나쁜 방법을 선택하였다. 칠년 동안 몸 하나로 벌어먹고 살았다는 그녀의 진술은 사실 그대로 였다. “아빠와 내가 함께 하는 생활은 처음부터가 떳떳지 못했다. 떳떳지 못한 남녀가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도시는 수많은 여관과 방갈로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여관과 방갈로는 떳떳한 사람들의 공간속으로 그녀와 같이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 장치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를 소유하게 된다.
익명성을 본질로 가지고 있는 아파트는 그녀와 같은 사람에게는 완벽한 주거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강지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아빠의 부인이 그녀를 찾아올 수 있다는 불안감이 아파트의 1층을 선택하게 만든다. 아빠는 투자가치와 주거환경을 이야기하면서 1층보다는 고층을 선택하라고 했지만,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직사할 것 같은 고층에서 살 수 없다”는 그녀의 고집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철회했다. 그녀는 항상 아빠의 부인이 쳐들어 올 경우 도망칠 수 있는 퇴로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바로 옆집에는 그가 살고 있었다.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은 아파트 환경 때문에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조심스럽게 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는 그와 일종의 동병상련적인 일치감을 느꼈다. “나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남자의 숨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건 분명히 쫓기는 자의 거칠고도 짓눌린 숨결이었다. 그건 어쩌면 나 자신의 숨결과 심장의 박동인지도 몰랐다” 이러한 감정의 동요는 그녀의 특수한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녀가 아직까지 서울 아파트 생활에 적응을 못했던 것도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였다. 그녀의 특수한 생활은 아파트의 익명성에 순응하면서 살면 별 탈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농촌공동체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맨션보다는 서민 아파트를 선호하고, 옆 집 사내에 대한 과도한 관심에서 그녀의 성격을 읽을 수가 있다.

그녀와 그의 관계가 심각해지기 시작한 것은 반상회 때문이었다. 일제가 한국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시행했던 반상회는 해방 이후 중단되었다가, 1976년부터 매월 25일에 정례 반상회로 다시 부활하였다. 반상회는 국가의 행정 방침 등 행정상의 공시 사항을 널리 알리고 주민의 건의를 반영하며 이웃끼리 서로 돕는 정신을 기르기 위한 모임이라는 명목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방적으로 국가시책을 전달하거나 홍보함으로써 당시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문패를 달자, 쥐약을 놓자라는 맨션아파트와는 어울리지 않은 공지사항도 있었지만, 국가시책에 대한 공지가 끝나자 반상회에 참석한 주민들은 살인사건 등 사회병리적인 화제보다는 십대들의 성경험 등 신변적인 잡담을 하다가 헤어진다. 그녀는 그에게 장난으로 반상회에 참석 안한 것을 문제 삼고, 문패를 달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베란다를 통하여 그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에 대한 관심은 이웃에 대한 호기심 이상의 것이었다.
다음날 ‘김철수’라는 아크릴 문패가 그의 아파트 문 앞에 붙었다. 그녀는 그에게 문패의 이름이 가짜가 아니냐고 따지고, 문패 달기는 농담이었다고 밝힌다. 그녀의 농담에 그는 인광이 파르르 떨리는 듯한 분노를 나타낸다. 그날 이후 그녀는 베란다 난간을 타고 옆집의 베란다로 건너가 밤마다 그의 방을 엿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인기척에 잠 못이룬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을 안으로 맞아주기를 갈망했다. “서로 따로따로 깨어 있음을 점점 더 견딜 수 없어져 드디어 나는 그의 창문을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풍처럼 가만가만, 점점 태풍처럼 거칠게” 그에 대한 이상한 애정이 싹튼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심전심의 정으로 그를 엿본 것이지만 그에게는 끔찍한 스토킹이었다.
밤마다 일어나는 두 사람의 이상한 갈등이 깨진 것은 신문에 난 그의 사진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쫓기고 있던 현상금 걸린 수배자였다. 5년 동안 잘도 숨어 있던 그가 무슨 심경의 변화에서인지 제발로 걸어가 자수를 했다는 기사였다. 그녀는 그가 왜 자수했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숨어살아야 하는 그녀가 오히려 아파트의 익명성을 무너뜨리는 문제적 인물이 된 것이다. 아파트가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도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므로.
장두식<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익명성을 본질로 가지고 있는 아파트는 숨어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완벽한 주거공간 이었다.
장두식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