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한국 문화 - 만물상

“햐”, “고것 참”, “이야, 이거 봐라”, “재밌네”
사람이 살아온, 살아갈 날들에 대한 모든 것이 있었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만물상
뽀얗게 먼지 쌓인 축음기,
가수 혜은이의
LP레코드, 가전제품,
노트북까지
이 곳에 모두 있다

수십만원 짜리도 있고,
몇백원짜리도 있는
만물상엔
정말
만가지의
물건들이
있는 듯 했다

2003년 청계천 복원 공사가 시작되면서 청계천 2~9가 사이에 늘어서 있던 황학동 노점상들이 동대문 운동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명 만물상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곳’이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축음기, 가수 혜은이의 LP 레코드에서부터 가전제품, 노트북까지 이곳에 모두 있다.
곳곳에 음란 테이프와 출처와 효능이 의심되는 정력제, 명품을 빙자한 소위 짝퉁 상품들도 널려 있긴 하지만 결국 벼룩시장만이 가진 특별함으로 인해 사람들에게는 그것마저도 이곳만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곳만의 특별한 점은 새것, 최신의 것보다 낡고 오래된 것일수록 값어치가 더 나간다는 것이다.
풍물 벼룩시장에는 만물상들이 파는 골동품과 함께 추억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또한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집근처 벼룩시장에 들른다는 이은국(55) 씨는 “추억의 비틀즈 LP판도 이곳에서는 천원, 이천원이면 살 수 있기 때문에 종종 오고는 한다” 며 “어릴 적 향수를 떠올리며 골동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성인용품점 앞에서 60대 할아버지가 ‘완전 오리지날 무삭제’라고 쓰인 안내판 을 보며 이것저것을 살피다 맘에 든 것이 있는지 주인에게 조심스럽게 가격을 묻는다. 이내 할아버지는 비디오테이프 두 개를 받아 가방에 넣고는 돈과 함께 자신의 명함을 건내며 “좋은 거 나오면 연락해” 하고는 행인들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이곳에서는 바깥세상에서 ‘은밀’한 취급을 받았던 것들도 ‘버젓’하게 나와 지나가는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또 한 곳에는 손님과 주인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는 데선 만원에도 봤는데 여긴 1만 5천원이나 하네…. 너무 비싸. 좀 깎아주지 그래?” 등산화를 사러온 할아버지의 말에 “우리 가게에서 파는 등산화는 쿠션감과 방수처리가 최고”라며 주인은 단번에 “않된다”고 한다. 그렇게 몇 마디가 오가더니, 결국 그 둘은 등산화의 가격을 1만 2천원으로 합의 봤다. 할아버지로서는 성공인 셈이다. 주인도 원래 가격에서 3천원이나 깎아 줬지만 얼굴에는 싫은 내색 하나 없다. 옆 가게에서는 1만원 짜리 구형 재봉틀 하나 사고 손님은 브로치 하나를 덤으로 가져간다. 이런 것이 바로 흥정이구나 싶다.
풍물 벼룩시장에는 이삿짐을 갓 쏟아낸 것처럼 다양한 물건이 넘쳐났다. 은나노 처리가 되어있다는 칫솔 4개가 단돈 1천원. 1천원짜리 바로 옆 가게에서는 윤기 흐르는 모피코트가 걸려있다. 주인에게 가격이 얼마냐고 슬쩍 묻자 3백 80만원을 부른다. 중고 가전제품을 파는 가게에서는 ‘각종 신용카드 환영’이라는 문구도 붙여 놓았다. 한 잡화점에는 빈 양주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가격이 2만원을 훌쩍 넘는다. 주인은 “이제는 생산되지 않는 양주병일수록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있어 빈병이라도 값이 꽤 나간다”고 했다.
시중에서는 몇 백만원을 줘야 살 수 있는 골프채도 이곳에서는 하나에 2~3만원이면 산다. 허기진 쇼핑객들을 위한 포장마차식 음식점도 1백여 곳이나 됐다. 몇몇 가게에서는 고래고기까지 맛볼 수 있다고 하니 정말로 없는 것 없는 만물상이다.
이렇듯 동대문에 다시 터를 잡은 풍물 벼룩시장이 제법 청계천 시절의 명성을 잇고 있는 듯 했다.하지만 청계천 ‘만물상’으로 통하던 노점상들에게도 그간 말못할 우여곡절이 많았다. 2003년 당시, 청계천 복원 때문에 삶의 터전을 내줄 수 없다는 노점상과 불법 노점상을 양성하지 않겠다는 서울시의 강경한 입장이 충돌해 청계천변에서는 매일같이 크고 작은 시위가 벌어지고는 했다. LPG 가스통이 동원되는 등 살벌한 장면들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명박 서울시장의 ‘동대문 운동장 수용’이라는 묘수로 지금의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
올해로 만 2년째 접어든 벼룩시장은 적어도 겉모습에서는 예전의 활기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따뜻한 봄바람에 상기된 행인들의 얼굴과는 반대로 상인들의 표정을 그리 밝지 않았다.
“노점상 20년 만에 이렇게 먹고 살기 힘든 적이 처음이야. 요즘은 애들이 천원, 이천원 달라고 조르는 것도 무섭다니까. 먹고살 돈 없어 빚내서 살어. 빚내서….”
하루 매상이 얼마쯤 되냐는 질문에 골동품을 취급하는 만물상 주인이 목소리를 높이며 손사래를 쳤다. 청계천 시절에는 하루 평균 10여만원의 수입은 올렸는데 요즘에는 손에 쥐는 돈이 몇 푼 되지 않는다며 울상이었다.

근처에서 중고 가전제품을 파는 이진수(62) 씨는 “일숫돈 2백만원을 빌렸는데 매일 원금과 이자를 2만 4천원씩 갚아 나간다” 며 “단속걱정 없이 장사할 수 있게 된 것은 좋지만 청계천때 보다 매출이 줄었으니 서울시가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해 우리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는 일부러 찾아오는 단골손님 외에도 청계천 주변을 드나들던 행인들이 호기심에 와서 물건을 하나, 둘 사가던 것에 비해 요즘의 벼룩시장은 동대문 운동장까지 일부러 들어오지 않는 이상 행인들이 이곳의 정체(?)를 알기란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요즘 상인들은 서울시장으로 출마한 한 후보가 자신이 당선되면 동대문 운동장을 철거하고 공원을 짓는다고 해 마음이 더 착잡하다고 했다.
지금의 상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어려움을 호소했지만 70년대 후반에는 노점상을 운영하던 상인들이 1천 여명이 될 만큼 크게 성행하기도 했다. 2,000원짜리 양복에, 와이셔츠와 넥타이는 500원이면 충분했으니까 명절이면 1만원 들고 와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광나게 차려입고 가던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 그뿐이랴. 90년대 외환위기를 맞으며 나라가 어려워지자 한 푼이라도 아껴볼 요량으로 서민들은 벼룩시장을 찾았다.
2006년 5월, 유난히도 맑은 주말 오후였지만 입구를 겨우 찾아 들어간 벼룩시장은 천막 때문에 안이 꽤나 어두웠다. 입구 근처의 노점상들이 아니고서야 구석진 곳의 상점에서는 낮인데도 백열등을 환히 켜 놓고 있어야 했다.
수백 개의 상점들이 줄을 지어 늘어섰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골목도 생겼다. 사람들은 질서 없이 쌓인 물건을 보면서 발걸음을 멈췄고, 가게 중에는 몫 이 좋아 사람이 붐비는 곳이 있는가 하면, 손님이 뜸해 얼굴에 신문지 한 장 덮어놓고 쪽잠을 자는 주인도 있었다.
분명 요즘은 70년대 한창 성행하던 그 때만큼은 못해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만물상’이라 부르며 추억과 향수를 찾아 이곳을 찾고 있었다. 물건을 찾고 값을 깎고, 더 좋은 것이 없나 이곳저곳 발품을 파는 모습에서 사는 냄새가 전해온다. 오늘도 이곳, 풍물 벼룩시장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물결로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