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바로보기 67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귀향’

유머와 판타지, 농밀하고도 가슴시린 이야기
삶의 고통을 이겨내는 여성들의 아름다운 연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수많은 딸들의 고백이 엄마를 닮아감에 따라
후회와 번민이 되버리는 현실”

이번 추석에 나는 돌아갈 고향이 딱히 없었으나, 어딘가 마음편히 쉴 곳을 찾아 떠나고 싶었다. 명절 내내 손하나 까딱 않고 입으로 제사상, 술상을 차려대는 크고 작은 아버지들과 손끝 물 마를 새 없이 일하는 엄마들 사이에서 나는 여자들의 ‘고향없음’에 대한 어떤 비애를 심란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집을 도망나와 숨어든 작은 영화관에서 ‘귀향’을 만났다.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바친다는 이 영화를.
영화는 다섯 명의 여인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라이문다와 딸 파울라, 라이문다의 여동생 쏠레, 그녀들의 친구 아우구스티나, 라이문다와 쏠레의 죽은 어머니 이렌느.
억척스러운 생활력의 라이문다는 막 사춘기에 접어든 딸 파울라와 알콜중독에 빠진 남편 파코와 함께 가난한 삶을 건사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딸 파울라가 자신을 강간하려던 파코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라이문다는 파울라를 안심시키고 나서, 죽은 남편의 시신을 수습한다. 한편 여동생 쏠레는 죽은 이모의 장례식에 갔다가, 그동안 병든 이모를 보살폈다는 죽은 엄마 이렌느를 트렁크에 태우고 돌아온다. 돌아온 어머니 이렌느는 딸 쏠레의 ‘야매’ 미용실에서 조수로 일하며 러시아인 행세를 하고, 그녀들의 이웃 아우구스티나는 집시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이렌느 유령을 수소문한다.

영화는 죽은 남편의 시신을 냉동고에 보관한 채, 능청스럽고도 수완좋게 생계를 꾸려가는 라이문다와 파울라, 사람들에게 유령 엄마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쏠레와 귀여운 엄마 이렌느의 일상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면서 진행된다. 딸을 강간하려 했던 남편의 주검을 마주한 라이문다의 고통스러운 상황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현실적이면서도 경쾌한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비참하거나 절박한 상황을 은근슬쩍, 불편하지 않게 처리하는 감독 특유의 시선 또한 강간이나 폭력이 주는 상처를 담담하고도 진솔하게 남아내고 있다.
라이문다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돌아온 이렌느, 그런 엄마를 평생 미워했던 라이문다, 성폭력과 살인에 대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파울라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무력하지 않은, 강한 의지와 사랑으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간다.
그녀들을 반목시키고 상처주었던 아버지, 남편의 존재감은 고향 ‘라 만차’에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남성들에 의해 파괴된 삶의 파편으로부터 그녀들은 할머니에서 손녀로, 혈연관계에서 이웃으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연대를 찾아간다.
서로에 대한 보살핌과 사랑, 끈끈한 배려로 구성된 그녀들의 자매애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우리의 삶이 어떻게 치유되고 행복해 질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다름아닌 소통과 공감, 그리고 세대와 혈연을 뛰어넘는 강한 연대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재기발랄한 유머와 판타지, 농밀하고도 가슴시리는 이 다섯 여인들의 삶 속에서 나는 여성인 나에게로의 ‘귀향’을 찾았다.
어머니에게서 딸로, 다시 그 딸에게로 전해지는 그녀들의 숨겨진 삶과 그 이면에는 우리들이 터부시 해 왔던 폭력과 슬픔에 대한 보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제껏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라이문다의 이 고백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관객들을 객석에 잡아둔다.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수많은 딸들의 고백이, 엄마를 닮아감에 따라 후회와 번민이 되어버리는 현실. 이 영화는 그 속에서 지금, 바로 여기서 엄마에게 그리고 딸에게 여자들에게 손을 내밀도록 용기를 준다. 나 역시 아직 엄마에게 말하지 못한 그 상처와 고통들 속에서 비로소 엄마와 화해하는 날, 라이문다의 고백을 기억하게 될까.

이진주<국문·3>
pearl2891@hanmail.net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귀향’의 한 장면.
이진주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