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하는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다. 무엇이 이런 전쟁을 일으켰는지 보는 시각과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간들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경비를 투입하면서 수많은 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빼앗는 일에 몰두하는 가장 우매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 미국은 국가의 안전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세력을 뿌리뽑고 응징하기 위하여 이 전쟁을 수행한다고 했고 이라크는 이라크대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 전쟁을 수행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내걸고 있는 ‘국가’는 과연 그런 희생을 요구할 만한 절대적 존재일 수 있을까? ‘국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하므로 사람들은 ‘국가’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국민 모두가 무조건 따라야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구상에는 고대부터 많은 나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던 로마 제국, 이집트 제국, 바빌로니아 제국도, 그리고 중국의 제국들, 신라, 고려, 조선의 제국들도 한 때는 번영하고 융성했으나 시대와 더불어 쇠잔하고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그 지도자들도 땅 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 제국의 지도자들은 모두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백성들의 생명을 징집하여 다른 국가와 싸우게 하고 피를 흘리게 했다. 그러나 수많은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지키려고 했던 그 국가는 시대와 더불어 영토가 바뀌고 구성원이 바뀌며 때로는 완전히 소멸되기도 하고 때로는 통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혀 별개의 나라가 되었다. 전 세계를 압도하던 소연방도 오늘날 여러 나라로 쪼개졌고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등도 여러 나라로 분할되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국가로 등장한 미합중국은 본디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 모여온 이민들이 만든 200년밖에 안 된 나라다. 이들의 불과 3,4대 전 선조들에는 영국인도 있었고 이탈리아인, 아프리카인, 러시아인, 중국인, 한국인도 있었다. 이렇게 여러 종족이 모여서 하나를 이룬 ‘국가’가 과연 자신의 국익을 위하여 수많은 자국 병사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또 다른 수많은 타국민들의 생명을 앗아가면서도 지켜야할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의 국가는 결코 영원할 수도 없고 나타났다가 얼마든지 사라질 수도 있는 일시적인 존재임을 역사는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이제는 좀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넓게 먹고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면 좋을 듯 싶다. 세계는 통신매체의 급격한 발달, 경제와 시장을 통한 재화의 공유와 교류로 인하여 급속도로 좁아지고 있다. 대규모 기업은 이미 국적을 초월하여 움직이고 있고 이 시대의 한 지역의 문화도 더 이상 국경선의 제지를 받지 않는다. 이러한 지구화 시대에 한 국가나 민족이 담을 높이 쌓고 타국과의 교류를 거부하며 언제까지나 독자성과 주체성에만 매달린다면 그것은 현대문명 속에서의 생존 자체를 포기하는 길이다. 개인도 지나치게 고립되면 인격의 균형이 깨어지고 인간으로서 성숙될 수 없듯이 국가도 지나치게 고립되면 국가로서의 균형이 무너지고 멸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은 수 천년에 걸쳐 삼국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역사를 살고 외세의 잦은 침략에 버티어 오면서 한 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독립국으로서의 국가관을 과거 어느 때보다 진하게 느끼며 이에 대한 긍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민족의식과 국가적 긍지는 2천 여 년 걸려서 얻은 소중한 우리들의 재산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들의 최종 목표일 수는 없다. 이러한 민족의식과 국가적 긍지는 매우 소중하긴 하여도 더 큰 미래를 위하여 극복되어야 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지향하면서, 통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주변 아시아 국가들과의 새로운 교류와 공존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와의 온전한 화합과 공존을 이루는 완성의 시대를 꿈꾸면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젊은이들이라면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는 데 만족하지 말고 지구촌의 여러 종족과 국민이 모두 한 형제로 어우러져서 각자의 고유한 문화와 삶을 존중하고 화합하는 시대의 새로운 시민, 地球民이 되는 원대한 꿈을 꾸어주기를 바라고 싶다.

■약력
- 1945년 10월 서울 출생, 사제서품(명동), 주교서품, 통합가톨릭대학교 초대총장
- 현재：천주교 제주교구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