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추격자>가 2008년 개봉 영화 중 최단기간(31일) 동안 4백만 관객을 돌파했다. 상반기 최고흥행작이 될 것 같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에 관한 기록을 실제와 많이 다르게 창의적으로 ‘각색한’ 주류영화 <추격자>는 흥행성적이 시사하듯 그다지 잔혹하지 않다.

가공의 아동성추행 살해·유기범과 사건주변의 다른 인물들(‘예의 없는 것들’)에 대한 모성의 복수극을 그린 <오로라공주>도 성추행 살해의 표현수위는 매우 낮다. 어떤 제도권 영화를 보더라도, 현실이 영화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우린 알 수 있다.

영화보다 현실이 훨씬 극적이고 참혹하다

2년 전 서울 용산의 여자어린이가 동네 신발가게 주인에게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뒤 불태워진 사건 등에 이어, 작년 성탄절에 실종됐던 안양의 여자어린이도 기어이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13세 이하 어린이 유괴사건은 2006년 18건으로 늘었고 어린이 대상 성범죄는 작년 1081건으로 급증했다. 필자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전신 격(格)인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재임시에는, 아동포르노 제작·유포에 관한 한 불모지대나 마찬가지였던 우리나라 사이트에서도 연초 들어 그 해외영상이 월별 수 건을 넘어 수십 건 출현하였다. 하여, 유포자에 대한 수사이첩 등 그 초동진압에 강력 대응한 바 있다.

그런데, 지난 달 29일 ‘공룡기구’로 법상 공식출범한 대통령 직속의 통합 정부부처 방송통신위원회와 대통령 위촉의 민간심의기구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최시중 방통위원장 후보의 뒤늦은 내정과 인사청문회 일정지연으로 아예 위원 구성조차 못하였다. 관련법과 기구는 존재하는데도 양 위원회에 단 한 명의 위원이 없어, 약 한 달여 간 직원 인사발령이나 불법·유해물 심의 등 업무 일체(一切)에 공백이 발생하게 되었다.

만약 야당과 언론노조, 시민단체 등이 극력 반대하는 최후보의 3월17일 청문회의결이 좌초되고 이대통령이 후보의 교체 아닌 임명을 강행하게 되면 법적으로 20일 후인 4월7일 이후에나 위원진 구성이 가능하게 된다.

통폐합된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1일 평균 9백 건의 과중한 물량(통신정보들)을 심의해 왔다. 현실과 현장을 잘 아는 나로서는, 새 위원회 구성 이후에도 위원들의 업무 파악에 약 한 달의 기간이 소요될 것을 생각하면 심정이 매우 착잡하다. 얼마 전 한 UCC전문 사이트 초기화면에 성인인증 없이 접속할 수 있는 포르노 동영상물이 8시간 게시, 노출되어 크게 문제된 적도 있다. 경과규정 없는 ‘법 공포 후 즉시발효’라는 새 방통법의 조항이, 우려되었을 뿐 아니라 충분히 예견되었던 업무공백·심의공백 사태를 몰고 온 것이다 .

지난 2월26일 초(超)고속도의 정부조직법 개정 진통과정에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된 128개 법률안, 그러니까 정부조직법 관련 다른 하위 법률안들과 경제·민생 관련 60개 법률안 등이 불과 두어 시간만에 뚝딱 처리된 적이 있다. 제·개정된 것 외에 나머지 수십 개, 특히 민생 관련 여러 법률안들이 국회 회기 및 일정에 쫓겨 폐기되고 말았다.

단편을 포함하여 얼추 8천 편의 영화를 봐온 나이지만 이 번 경우는 참으로 ‘극적’이고 또 몰상식하다고 본다. 과연 문명국의 국회와 정부다운 현상인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한국경제신문>의 당일 관련기사(인터넷판) 제목들이 재미있다. “4월 표밭에 마음 떠난 의원들”, “제대로 심사나 했나…128건 벼락 처리”, “골치 아픈 법안은 나 몰라라”.

동방의 비(非)예의지국이 되려는가

19세 베트남 신부 후안마이는 작년 7월 천안의 한 지하 셋방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46세 남편에게 맞아 갈비뼈가 18개나 부러져 있었다. 지난 6일엔 아파트에서 추락사한 베트남 신부의 사인이 크게 논란이 됐다. 베트남 사회는 다시 슬픔과 분노에 빠졌다. 베트남전의 악연과 상처도 잊고 한류에 열광해온 베트남 국민들이기에, 우리는 더욱 낯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지 못할 처지가 되었다.

외국의 신부들을 물건 수입하듯 들여오고 뒷감당을 못하는 나라. 세계경제 10위권의 다민족국가이면서 유독 인종차별, 소수자차별이 강한 대한민국 사회. 동아시아 도처에서 한류가 퇴색하고 이미 불기 시작한 역한류의 바람이 조만간 우리를 덮쳐올지도 모른다. 2012년의 “문화5대강국 진입”은 고사하고서 말이다.

지난 주 후안마이 피살사건의 대전고법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에 갇힌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며 이러한 극단적 사건이 개인의 인성을 넘어 사회의 책임임을 강조했다. 아동·노인·장애인·극빈층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약하고 안전망 또한 취약한 나라에서, 이러한 사회적 관습과 문화마인드가 팽배해가며 무릇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해갈 때 잔인한 사건과 극단적인 사건은 자꾸 늘어날 것이다.

보성 앞바다에서 20대 남녀 4명을 연쇄살인한 71세의 어부 오모씨나 숭례문 방화범인 70세의 채모씨의 경우, 그들 개인적 차원에서는 우선 성격장애 같은 심리학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를 넘어 노년기에 발생하는 뇌기능 장애를 의심할 수도 있다. 그렇긴 하지만, 그와 함께 시야를 넓혀서 우리사회의 ‘소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가족, 이웃, 지역사회, 정부부문 등으로부터 노인, 장애인 그리고 궁핍한 독신남들이 겪는 고립과 소통의 문제 말이다. AIDS보균자, 약물중독자, 정신이상자들의 문제도 마찬가지고….

곽영진 (영화평론가)

곽영진  dkdds@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