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번, 이 시리즈의 2회분 원고에서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현실이 영화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제도권 영화에 한하여, 주로 표현 수위에 초점을 맞춰 한 말이다. 제도권영화란 상업영화권 내의 예술영화와 컬트영화를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상업적 극장배급망을 탈 수 있을 정도의 대중적 코드를 갖춘 영화를 말한다.

폭력·선정성에 대한 대중적 정서와 시각 과도한 폭력성 및 욕설로 비난 받았던 조폭영화 <친구>가 2000년 초 관객 8백만 이상의 대박을 터뜨린 것에는 웰메이드(wellmade)의 세련미와 함께, 구체적 폭력 묘사에 한계를 그은 감독의 자제(절제?)가 원인으로 한몫을 했다. 지난 주 언급한 <추격자>도 마찬가지다. 폭력적인 묘사를 정서적으로 싫어하거나 허구영화의 폭력성이 현실에 끼치는 소구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제작진이나 감독이 (제도권 및 주류 영화의 틀 내에서) “자제했다” “타협했다”고 하는 견해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소구(訴求/appeal)라 함은 현실 및 현실의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이상의, 말 그대로 호소를 뜻한다. 예술작품이나 광고·선전 등의 표현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폭력·선정성 문제에 대한 ‘대중적’ 시각의 고려와 채택은 반드시 상업적이거나 상업주의적인 것이냐?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래 전통적 문화산업론의 큰 틀이나 논리적 궤를 같이하면서도 그와는 적잖이 다른, 즉 그 사회·문명적 주요 비판점은 수용하면서도 대중의 정서와 이중성 등에 주목한, 80년대 이후 유럽의 신(新)비평론과 관객론의 입장에서도 ‘참여적 대중’의 시각이 가능하다.

한층 더 나아가면, ‘능동적 대중’의 시각도 가능하다. 한편, 표현(묘사)의 측면과 함께 극적(劇的)인 설정과 상상력의 측면에서도 영화가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그럴까? 우선, 상업영화에서 소재와 설정(가치관) 상의 편중성이나 극단성에 대해 말해보자. 이런 것은 표현상의 과도한 폭력성·노출성(nakedness)처럼 관람률을 크게 떨어뜨리며 또한 비난 공세와 그 여파를 초래한다는 상업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을 대두하게 한다.

이 때문에 롤리타, 호모포비아, SM(가피학증), 반기독교, 인종주의, 테러리즘 따위와 관련한 소재와 설정의 편중성, 극단성은 경계되거나 배제된다. 영화나 방송드라마의 제작 전 기획 단계에서부터 관람률과 시청률 등의 흥행 요소가, 즉 그것에 관한 경험적 판단이 작동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극적인 설정(지향)의 측면 말고 상상의 측면에서도 허구의 영화가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말해보자. 지금은 극적(劇的)임과 동시에 극적(極的)인 상상 능력에 대해, 요컨대 현실의 개연성을 반영하고 또 그것을 초월하는 드라마틱한 창조능력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현실을 초과(월)하기는커녕 현실을 뒤쫓거나 현실에 견인당하는 대중문화, 특히 영화의 극적 상상력의 한계는 어디에서 오는가? 현실의 역동성과 극악범죄자의 불가사의함 그것은 극단주의자나 ‘정신병자’의 상상적 치열함, 열정, 편집증과 탈(脫)현실적 근본추구, 극단선호를 대중문화 중에서도 시각적 구현에 주력하는 영상예술 매체이자 엔터테인먼트 산업인 영화 쪽이 맞서고 이겨내기 어려운 측면에서 비롯된다.

9·11테러처럼 쌍둥이빌딩 및 펜타곤에 대한 비행 자폭(自爆)과 붕괴 기도는 9·11 전 어떤 영화도 상상하고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 잔인하고 참혹한, 그러면서도 거창하기 이를 데 없는 정경을 상상하기란…. <추격자>의 지영민 같은 ‘악마’의 상상(창조), 아니 그 창의적 복제도 현실의 사건과 인물(유영철)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는 현실로부터 복제되지 않은, 인물의 가공성(架空性)과 특히 그 지나친 과장성 때문에 인물의 개연성이 약하고 전형성을 상실한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어떠한 불륜치정극도 창전동 4모녀 일가족을 살해한 전 프로야구선수 이호성같이 악랄하고 뻔뻔한 캐릭터를 상상해내지 못했다. 빚쟁이에게 시달리느니 새 남편과 아빠인양 따르는 네 모녀를 죽이고 돈을 가로채 채무를 변제하는 것으로 삶의 ‘새 희망’을 찾으려는 그 불가사의한 성정(性情)을….

남의 자식은 몇 명씩 무참히 살해-유기하고서도 자신의 자식은 마지막 순간까지 안위를 염려하며 부탁하는 이상한 부정, 그 이중적 캐릭터를 상상해내지 못했다. 근자에 미 정부가 2001년 알 카에다의 9·11테러를 직접 계획했거나 사주했다는 주장이 만개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루스 체인지(Loose Change)>는 이러한 음모론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지만, 그 대담한 상상력도 어디까지나 9·11의 사후적인 것으로서 본원적 독창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대중문화의 ‘킬러 콘텐츠’로서 황제의 지위를 지닌 영화는, 진작부터 (그 소재와 이야기, 형식과 테크닉에 있어)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울 게 없게 되었다. 진정한, 완벽한 새로움이란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대담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 이야기와 형식, 스타일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현실과 선현으로부터 분리된 진본성, 완벽성을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자본과 기술이 기반이요 관건인 대중문화 영역에서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실감난다.

곽영진 영화평론가  dkdds@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