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의한 합법적 ‘살인’에는, 1차적으로 사형이 있고 2차로 전시의 무장 적군에 대한 살해행위가 있다. 후자의 경우, UN이 반대하는 가운데 국제법과 충돌하며 감행되는 선제공격의 ‘예방전쟁’이라면, 더구나 물증(대량살상무기의 존재 증거) 제시 없이 오히려 그 물증을 찾아내 제거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한다면 전쟁 및 살해행위의 합법성 기반은 붕괴되고 만다.

새천년 초 시작된 미국의 ‘불법적’ 이라크침공 및 영국·스페인·호주·한국 등의 참전은 ‘살인’의 정당성이 없어 인류와 한국인의 양심을 짓누른다. 다시 불붙은 사형제 존폐 논란 아녀자를 대상으로 한 잔인한 살인행위가 알려질 때, 가정·직장·술자리 등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사람들―대중이기도 하고 선남선녀이기도 한 그들―의 반응은 매우 격하다.

민초의 다수가 사형제에 대해 찬성함은 물론, 그 일부는 살인범(사형수)의 인권을 저버리거나 유린하는 처형을 주장한다. 예컨대, 그냥 죽여서는 안 되고 “끔찍한 고문을 통해서…” “육시(戮屍)나 능지처참을 해서…” 죽이자든가 “잘근잘근…” 어쩌고저쩌고해서 죽여야 한다며 열변을 토한다. 말과 뜻에 괴리가 큰, 감정에 치우친 표현법(과장법)이긴 하겠으나 예사롭지만은 않다. 미국의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 일부를 연상케 한다. “우리 자신의 뒤에 숨어 있는 우리 자신 / 대부분 그것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지.'

지난 달 21일, 김문수 경기지사가 안양 초등학생 유괴·살해 사건과 유영철을 거론하는 가운데 “사형선고를 받고도 집행이 안 되는 것은 잘못”이라며 “범죄자의 인권은 있고 아녀자들의 인권이 없는 나라라면, 인권이 없는 나라인 셈"이라고 말해 신문과 인터넷 안팎의 논란에 불을 지폈다. KBS 라디오의 제1466회 <열린 토론>은 25일 ‘다시 불붙은 사형제 존폐 논란,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범죄억제 효과 등 사형제 존폐 논란의 핵심 쟁점과 합리적 대안을 모색했다.

3월 중·하순 국내 주요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도 사형의 강력한 집행을 요구하는 누리꾼들의 분노와 항의가 쏟아졌다. 누리꾼들은 “10년간 사형집행 안하더니 이런 일이 자꾸 생긴다”며 들끓는 분위기였다. 어떤 아이엄마는 “단 한 번에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여생을 고통 속에 살다가 죽게 만들어야 한다”며, 일견 사형제에 반대하는 듯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외신에 의하면, 연전엔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종신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인 이탈리아의 죄수 7백여 명이 ‘죽어서야 끝나는 형벌’ 종신형의 폐지 및 사형제의 재도입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벌였다. 단식은 구랍 1일 중부 도시의 한 교도소에서 시작되어 2일만에 50여개 교도소로 확대됐다. 이와 함께 자칭 ‘99/99/9999’ 그룹은 3일 이탈리아 ANSA 통신의 파리지국 사무실을 점거한 뒤, 종신형 복역수들의 단식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이 그룹은 성명을 통해 “종신형 복역수 1천295명 중 755명이 이번 단식 투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며 “여기에는 그들의 가족과 친지·친구들도 함께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지난 5월말 종신형 복역수 310명은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 “우리는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데 지쳐 있으며 단 한번에 죽기를 원한다”고 호소하면서 사형제의 재도입을 촉구한 바 있다. 구속, 절망, 권태의 기나긴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큰 고통이라는 얘기다.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법전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눈에는 눈, 이에는 이’)과 고조선의 팔조금법 이래 장구한 역사를 통해 유지되어 온 복수주의 내지 엄벌주의 형벌론의 주장을 머쓱하게 만드는 사례이다. 피해자는 살인자의 죽음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가 열세였지만 사형제 폐지를 지지하는 누리꾼들도 있었다. 한 누리꾼은 “사형 역시 또 다른 살인이 될 수 있다”며 “흉악 범죄를 예방하는 데는 법·제도적 접근과 사회·문화적 의식개선이 우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다른 누리꾼은 “피해자는 살인자의 사형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거나, “꼭 목숨을 목숨으로 받아내려는 구시대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안양 사건 때문에) 너무 쉽게 감정에 치우쳐 사람 목숨을 끊어라 마라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글을 남겼다.

서울중앙지법의 문유석 판사는 「한국경제신문」 칼럼과 법원홈페이지 ‘법원칼럼’을 통해 “결국, 다른 모든 위험과 마찬가지로 범죄 역시 절멸의 대상이라기보다 관리의 대상이다. 위험을 절멸하려는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위험을 낳기에, 적정한 선을 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라면서, 범죄율을 낮추는 데 효율적인 것은 엄벌보다는 필벌(必罰)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리 엄벌을 한다고 해도 적발되어 체포-처벌될 확률(필벌로 이어질 확률)이 높지 않으면 범죄는 줄지 않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 충동적 범죄를 제외한 일반 범죄(납치·유괴 등 흉악범죄 포함)의 발생비율은 상당히 떨어진다는 뜻이리라.

영화 <추격자>나 <살인의 추억>이, 그리고 유영철·이호성·정성현 사건보도와 수사비화가 말해주듯 치안 및 과학수사력 강화야말로 사회·문화적 의식 개선, 범죄발생 환경 억제와 함께 보다 효과적이고 장기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사형제도를 정면으로 다룬 명화로는 알란 파커 감독의 <데이비드 게일>(2003)과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1988), 할리우드물인 <데드 맨 워킹>(1995) 등이 있다. 이 중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제의 가장 큰 맹점인 ‘오심에 의한 집행 뒤 환원 불가능’에 초점을 맞춘 흥미만점의 영화이다.

곽영진  dkdds@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