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fan)’, ‘마니아(mania)’, 그리고 ‘오타쿠(オタク)’. 이 단어들은 비슷한 대상을 지칭하지만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팬’이나 ‘마니아’가 대중적이고 건전한 취미를 공유하는 동아리를 지칭한다면, ‘오타쿠’는 보다 폐쇄적이고 불온한 계층을 연상하게 한다.

밖에 나가 활동하기보다 방에 틀어 박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따위를 탐닉하는 사회부적응자들, 사람보다 캐릭터나 피규어 인형에 더 애정을 느끼는 변태적 성향의 소유자들, 나이를 먹고서도 어린아이의 취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피터팬증후군 환자들. ‘오타쿠’라는 단어에는 이와 같은, 혹은 이보다 더 지독한 편견이 붙어 다닌다. 맞다. 이 책의 저자 오카다 토시오는 분명하게 말한다. 그것은 편견에 불과하다고. 왜 편견에 사로잡혀서 그들의 잠재력을 알아보지 못하느냐고.

그의 관점에서 보면 오타쿠들은 자신의 취미를 위해 아낌없이 재화와 노력과 열정을 투자하는 능동적인 소비 집단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지극히 세부적인 정보까지 탐닉하는 집착적 수집가이고, 그를 통해서 고도의 전문 지식과 비평적 안목을 갖추게 된 문화지식인들이다. 오카다 토시오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가 설립했던 회사 <가이낙스(GAINAX)>에서 발표했던 애니메이션과 컴퓨터게임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작품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니다. 흥행의 측면에서 보자면 참패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타쿠들은 열광했다. 대중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작품이 판매량에 있어서는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 작품들 속에는 오타쿠의 취향에 부합되는 스토리텔링과 아이템이 잔뜩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작품들이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타쿠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기 때문이었다.

일단 기회가 제공되자 잠재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들이 가진 전문지식은 작품의 질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그들의 열정이 작품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제 오타쿠는 소비자와 비평가의 단계를 넘어, 창작자로서의 재능까지 발휘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서서히 오카다 토시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는 동경대학에서 <오타쿠문화론>을 강의하면서 오타쿠의 문화가치를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시도를 시작했다. 이 책의 많은 부분도 그 강의를 통해서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책의 마지막에서 그는 다시 말한다. 문화가 중심이 되는 시대가 될수록 오타쿠의 가치는 빛을 발할 것이라고.

요즘 들어 문화콘텐츠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누구나 문화콘텐츠에 대해 아는 척 하고, 문화산업이 가진 고부가가치성에 군침 흘리며, 우리나라의 열악한 제작 시스템에 대한 우려와 동정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논의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시스템을 개선한다고 좋은 콘텐츠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든 콘텐츠가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 것도 아니다.

이론가들의 수준 높고 정교한 이론은 정작 창작 활동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좋은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한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방법은 뛰어난 인재를 발굴하여 육성하는 것이다. 오타쿠들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한없는 열정과 집착, 그리고 창의력을 갖춘 이들이야말로 문화콘텐츠 분야를 주도할 인재이다. 이들이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인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고 또한 전략이다.

최수웅 교수  dkdds@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