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광화문에 갔다. 아직 잎이 자라지 않아 비가 가지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이 광화문 네거리가 보이는 모퉁이 커피점에서 한참이나 앉아서 우산을 쓰고 황급히 걷는 이들을 보고 있었다.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학에서 배운다는 것이 고등학교 때와 무엇이 다른지도 알지 못했고 담임선생님이 모든 것을 챙겨주던 시절과 달라진 대학생활에 허둥거리는 일이 많아졌다. 어느 날 강의 시간에 대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생활이라고 했다. 이 생활이라는 말은 나에게 생소하게 느껴졌다. 도서관을 이용한다든가 친구들과 어울려 스터디그룹에 참가한다든가 아니면 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나에게 교수가 말하는 생활이라는 것은 조금 달랐다. 교수는 개인적인 나의 생활을 말하고 있었다. 즉 대학생으로서의 삶에 관한 것이었다. 하루의 생활에서 얼마나 자신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일과 연관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를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활속에서 학문으로 사는 길과 사람이 되는 길을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오는 길에 교수의 말을 떠올리고 내가 대학에 다닌다는 것이 마치 둥둥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나뭇잎처럼 분위기만 익히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 순간 선배가 ‘우리는 지금 외국에서 들어오는 책들을 어떻게 빨리 그리고 먼저 체계화하는가에 따라서 학문의 수준이 달라지고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다음 날 강의가 끝나 외국책을 수입해 팔고 있는 광화문의 한 서점을 찾았다.서점에는 알 수 없는 각 분야 책들이 꽂혀있었다. 빙 한바퀴를 돌고 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이 서점을 매일 들러보게 되었다. 대학 사년 다니는 동안 가장 많이 간 곳이 이 서점이었다. 동숭동에서 비원앞으로 해서 낙원동을 거쳐 광화문의 이 서점까지 걸어오면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그런 생활이었다. 이 서점을 다니는 동안 나의 전공과 관련된 서적을 만나게 되었다. 좋은 책을 발견하고도 돈이 없어서 그냥 두고 나오면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꼭 누가 사가버릴 것 같았다. 매일 서점에 들리는 일을 하면서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내가 필요한 책을 발견하였지만 돈이 없을 경우에는 책을 뽑아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거꾸로 꽂아 놓았다. 그리고 돈이 마련되면 뛰어가곤 했다. 일년쯤 지난 어느 날 서점에서 책을 거꾸로 꽂아 놓고 있는데 서점주인이 내 등을 치면서 ‘꼭 사야하는 책이면 뽑아서 카운터에 맡겨놓고 돈이 되면 오너라’하고 웃었다. 내가 진열된 책을 뽑아 거꾸로 꽂아 놓고 가는 것을 안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 서점에서 외상으로 구입할 수 있는 길을 텄다.
커피점에 앉아 광화문 거리를 보면서 대학시절을 회상하고 이 회상의 저편에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이 버릇처럼 광화문 서점을 다녀서 얻을 수 있었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대학 2학년 때였다. 나는 우연히 대학다방에서 화학과 교수님를 보게 되었다. 혼자 앉아 계셨다. 내가 다가가 ‘교수님, 제가 커피 한잔 올리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교수는 크게 웃더니 ‘화학과냐?’하고 물었다. ‘국문과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교수는 ‘그래’하였다. 그후 다방에서 가끔 교수님을 만나게 되고 교수님은 나를 보고 가까이 오라고 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대학시절 친하게 지내게 된 교수님 한 분이 되셨다. 교수님은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사람이라는 그릇에 제대로 담지 않으면 올바르게 인간의 삶에 기여할 수 없다는 점을 일러주셨다.
대학에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에 나가 직업을 얻기 위한 준비과정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대학을 직업훈련소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사회적 존재가치와 본질적 존재가치로 대별해볼 수 있다. 먼저 사회적 존재가치는 성장하여 한 인간의 몫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사회로 뛰어들어 다른 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사회에서 필요한 존재로서의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또 본질적 존재가치는 사회적 존재가치와 동전의 뒷면처럼 자아라는 존재의 개체적 생명의 성장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삶을 발전시켜간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대학은 이 두 가지의 길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습득이라는 도식이 아니라 검증과 비판을 통해 창조정신을 세워가는 도정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생활이라는 극히 미미한 하루의 삶의 행로를 통해 생명의 올바른 창조적 성장과 학문의 지적 성장의 근본이 참다운 인간에서부터 자란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약력
- 1939년 경북 월성군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출생 /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및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 박사 / 토론토대학, 객원교수 역임
- 저서로는 『한국현대소설의 비평적분석』 『현대한국소설의 성격』 『전후대표작품분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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