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미디어 시대의 아방가르드

최근에 와서 가끔씩 ‘디지털 바우하우스’라는 단어를 접하게 된다. 일찍이 20세기 초에 오늘날 미술대학교육의 기초를 만들었던, 또 그것을 통해서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을 시도했던 바로 그 ‘바우하우스’에다가, 현대의 정보기술과 거기서 파생된 새로운 문화의 상징어라고 할 수 있는 ‘디지털’을 붙인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적으로 많은 예술대학에서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멀티미디어 환경에서의 문화와 예술’을 전제로, 교육과정을 개편하는 바람이 불고 있으며 그때마다 이와 유사한 비전이 거론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예술이나 문화 속에서 멀티미디어를 제창할 때, 또 멀티미디어라는 한마디로 세상을 이해한 듯한 자세를 취하는 동안에 오히려 엉뚱한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시대의 새로운 미디어로부터 성립된 대학은 그 미디어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특히 기술의 생존수명이 짧은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어떤 예술대학이 초기에 많은 예산을 들여 장비를 마련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육의 프로세스를 확립하였다고 하자. 역설적으로 그것은 그 장비의 중압으로부터 그만큼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비해, 해를 거듭할수록 장비의 성능은 상대적으로 저하되고, 처음과는 달리, 기자재의 업그레이드를 위한 새로운 예산의 투입은 쉽지 않을 것이다. 또 머지않아 기술의 환경이 바뀌고 결국 그 기자재는 애물단지가 된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동안 그 대학의 교육은 활력을 잃어버린 것이 되고 만다.
자연과학이나 공학계에서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실험으로 입증하여 발표하게 되며, 여기에 특별하거나 첨단의 성능을 지닌 장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예술은 분석만으로 작품이 성립되지 않으며, 종합/융합/관련짓는 작업이 중요하다. 예술가는 늘 이런 일을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교육에 있어 반드시 ‘첨단 기자재’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그러한 기계가 예술의 장밋빛 미래를 열 것이라는 환상이 바로 문화전략상의 함정일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외국으로 유학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드웨어나 최신의 정보는 누구라도 손을 뻗으면 거의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고, 가까운 미래에 풍성한 미학적 실험의 장이 될 정보네트웍에서도 한국은 가히 세계 최고수준이다.
그러므로 미래예술의 인프라를 하드웨어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생각을 바꿀 때가 되었다. 오히려 예술가가 추구해야할 ‘의미와 가치의 창조’가 현혹적인 특수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세련된 테크닉이나 근사한 프로그래밍에 의해 덮혀 버린 상황이 더 큰 문제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예술대학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방가르드 정신, 그리고 주체적으로 설정한 과제에 도전하는 워크샵의 문화이다. 지난 세기 동안 수없이 많은 형식적 실험을 거듭하였던 예술이 정보기술혁명의 물결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전개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낯익은 것이고, 멀티미디어 환경에서의 표현수단의 통합과, 이에 수반되는 장르의 통합, 형식의 파괴, 예술과 일상의 만남, 예술과 과학/산업과의 만남 등 다양한 현상들이 서로 맞물려서 지금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종합적인 시각을 가지고, 어떤 해석도 가능한 시각을 스스로 발견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바우하우스를 창설했던 그로피우스의 비전은 중세의 대성당에서 나왔다. 즉 그는 모든 직능이 통합되어 기능하는 ‘미래의 대성당’이라는 이미지를 유토피아로 그렸던 것이다. 거기에는 예술과 공예 등의 전원적인 요소와 기계기술과 같은 상반되는 것들의 통합과, 노동의 합리화와 해방이 내재되어 있었다. 실로 인간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없으면 그와 같은 비전이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여행이 필요하다. 지금은 인터넷 여행이 일상이 되었고, 실제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도 많이 흔해졌다. 하지만 진정한 여행은 다른 문화, 다른 학문, 다양한 개성과 환경들 간의 거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나와 우리의 내면을 향한 것이고, 늘 새로운 발견이고 탐험이 될 수밖에 없다. 조금은 케케묵은 이야기 같지만, M. 맥루한은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고 말했다. 즉 인간이 바로 모든 미디어의 원형이다. 이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할 때가 아니던가?

이 원 곤
<예술대학·예술학부·서양화전공>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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