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규보의 <용풍>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동명왕편」과 「백운소설」을 비롯하여 우리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고려말의 대문호이다. 우리가 이번에 읽을 우언은 그의 <용풍(傭諷)>인데, 거사의 게으름을 치유하기 위해 꾸며낸 손(客)의 묘안이나, 손의 말을 듣고는 그동안의 게으름을 다 잊어버리고 서둘러 나서는 거사의 행동, 그리고 그런 거사를 각박하게 꾸짖지 않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손의 칭병(稱病) 등은 가히 일품이라 할 만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하면서도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글이다.
게으름 병을 가진 거사(居士)가 있었다. 하루는 그가 자신을 찾아온 손(客)에게 물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게으름을 떨치지 못하고 게다가 몸까지 약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세 그려. 내 하도 게으르다보니 집안에 풀이 우거져도 건사하지 아니하고 많은 책에 좀이 슬어도 펼쳐보지 아니하며, 머리가 헝클어져도 빗지 아니하고 병이 나도 게을러 치료하지 아니하며, 남과 농지거리하면서 노는 일에도 게으르고 왕래하는 일에도 게으르며, 말하기도 게을리 하고 걸음걸이도 게을리 하며 눈으로 보는 것도 게을리 하여 땅을 밟거나 일을 하거나 무엇이든 게으르지 않은 것이 없네 그려. 자네 혹 이 병을 고칠 묘안이 없겠나?”
손은 아무런 대답도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손은 거사의 게으름 병을 낫게 할 방법을 궁리하더니, 열흘이 지나 다시 거사를 찾았다.
“한동안 보지 못했더니 자네가 몹시 그립더군. 그래 잘 있었나?”
거사는 게으름 병 때문에 손을 대하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손은 굳이 거사를 청하여 그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자네의 그 부드러운 웃음소리와 조용한 말소리를 한동안 듣지 못했구먼. 춘삼월이라 그런지 오다보니 날씨도 좋고 동산엔 새들이 지저귀고 꽃들도 울긋불긋 많이도 피었더군. 실은 말일세, 우리 집에 잘 익은 술이 있는데 밥알이 동동 뜬 것이 향기가 방안 가득하고 훈기가 독 안에 넘쳐나 참 맛있어 보이더군. 혼자 마시려니 자네 생각도 나고 해서 우리 집에 가서 함께 마시자고 이렇게 청하러 왔네. 그리고 뭐 그리 자랑할 것까지야 없지만, 우리 집엔 노래도 좀 하고 생황도 좀 불 줄 알고 비파도 잘 타는 아이가 하나 있지 않나. 자네도 아는 것처럼 그 애의 재주는 혼자 듣기가 아까워서 말일세. 자네가 잠깐 짬을 내 준다면 좋을 듯하여 이렇게 찾아 왔네만, 같이 가겠나?”
이 말을 들은 거사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옷을 떨쳐입고 일어나며 말했다.
“자네가 늙은 나를 괄시하지 않고 맛있는 술과 어여쁜 자색으로 답답하던 내 마음을 위로해 주려는데 어찌 사양하겠나?”
거사는 행여 늦을세라 허리띠를 서둘러 매고 신을 재촉하여 신고는 급히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거사를 청하러 온 손이 갑자기 게으른 태도를 보이며 입마저 게을러져서는 대답하지 못할 것같이 하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손은 태도를 고치고 말했다.
“자네가 나의 청을 승낙했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네. 그러나 전에는 자네의 말이 게으르더니 지금은 빠르고, 전에는 돌아보는 동작이 게으르더니 지금은 빠르며. 게으르던 걸음도 이렇게 빨라졌으니, 아마도 그대의 게으름 병이 다 나은 것 같네. 허나 성품을 해치기로는 여색 만한 것이 없고 내장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는 술 만한 것이 없는데, 자네는 유독 여색과 술에 대해서만은 자기도 모르게 게으름이 없어지고 빠른 걸음걸이가 마치 저자에 가려는 사람 같으니, 자네가 이대로 가다가는 성품을 훼손시키고 몸을 망치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 같네. 나는 자네가 그렇게 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네. 그래서 내 말이 게을러지고 행동도 게을러 진 것인가 보이. 자네의 게으름 병이 나에게 옮은 것인가?”
거사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고 이마에 땀이 났다.
윤승준  (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